Loading

영점(Zero Point)에 서기

도리스 폰 드라텐

2008

  • 경험과 상상에 대한 우리의 선형적 개념들이 갖는 제약 안에서 해와 달의 결합은 그저 하나의 관념, 우리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행성의 이례적인 배열—가령 해와 달이 겹치는 일식—은 그 본질상 이와 상당히 다른데, 왜냐하면 이때는 두 천체가 동시에 보이지 않으며, 한 천체가 다른 천체의 앞을 가려 그것으로부터 빛을 빼앗아가는 그림자의 순간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해와 달의 실질적 결합은 우리 실재의 한계선들을 파열시킨다. 그 방식은 언제나 불가능의 위반, 낮과 밤이라는 이원성의 위반—그리하여 모든 시간과 장소의 공식과 법칙을 차단하는 위반—을 표현하는 메타포로 인식되었다. 해와 달의 결합은 불가능성의 아이콘이다. 김수자가 그의 비디오 설치 작품 <거울여인: 해와 달(A Mirror Woman: The Sun & the Moon)>에서 화면으로 정확히 이 불가능성을 우리가 경험하게 할 때 그는 트릭(tricks)을 쓰고 있지 않다. 일몰과 월출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되는 내내 이미지들의 시퀀스는 실시간으로 펼쳐진다. 누군가는 이 예술 작품 자체는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남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김수자가 서서 하늘의 사건들을 관찰한다. 예술가는 바로 그 현장에 자리해 있으며 그 지점은 지진계로 정확히 측정된다. 그 지점은 사실상 제로(Zero)의 장소다. 그는 행성들 사이의 접합점에, 해와 달의 궤도들 사이의 틈에, 의식의 가장자리에, 거울의 끝에 서 있다. 나머지는, 고정된 카메라와 개방된 프레임과 더불어, 월출과 일몰이 마침내 서로 포개어질 수 있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 하지만 이것은 김수자가 최근에 작업한 이 4채널 비디오 설치 작품의 네 벽면 사이에 펼쳐진 저 회화적 공간에서 관람자가 경험하는 사건에 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관람자를 사로잡는 매혹은 실로 엄청나다. 작품에 들어서자마자 관람자는 쉼 없는 파도 소리에 붙들리며 바다의 수평선으로부터 눈길을 거두지 못한다. 바다가 한없이 부드러운 얕은 물결로부터 솟아오른 빛의 은색 평면을 겨우 알아볼 만큼 느린 속도로 횡단하는 사이, 수평선은 점차 낮아져 간다. 희뿌옇게 일렁이는 얕은 물결은 반사된 부분은 불그스름하고 투명함 속에서는 희고 매끄럽다. 동시에, 마찬가지로 서서히, 붉게 작열하는 둥근 해가 이 극단적으로 커다란 달에 가까워지다, 어느 순간 달의 위쪽 테두리와 맞닿고 이내 달의 원 안으로 진입해 아까 그 테두리와 이번에는 안쪽에서 맞닿았다 이 둥근 평면의 은빛 표면을 마찬가지로 서서히, 하지만 자유로이 미끄러지다 다시 어느 순간 달의 아래쪽 테두리와 안쪽에서 맞닿고 그다음에는 이 아래쪽 테두리와 바깥쪽에서 맞닿았다 이내 달에서 떨어져 나와 수평선 가까이로 이동하여, 그 흐릿한 공간 속으로 거의 눈치채지 못할 만큼 서서히, 하지만 돌연히, 잠기어 사라진다. 이 회화적 공간에서는 운동의 몇 가지 형식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상승과 하락의 상반되는 각 궤도 안에서 서로에게 가까워지는 것은 비단 해와 달만이 아니다. 고대의 조화에서, 대양(大洋)의 파도는 치솟아 행성들의 궤도와 합류한다. 달이 떠오르면 파도들은 뒤로 끌려가고, 다시 그리고 또다시 모래를 쓸어간다. 빛을 등진 그림자 같은 야자수 잎이 바람에 떨리는 모습은 마치 이 중대한 호흡의 순간에 울려 나오는 합창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모래를 끊임없이 쓸어가는 파도들은 마치 물러나는 듯하다 이내 모래 위로 다시 쏟아지는데, 이 운동은 마치 해와 달의 거대한 두 궤도가 이루는 우주의 조화 속에 아로새겨져 있는 듯하다. 물론 이 조화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 지구의 실제 운동의 환영(幻影)을 구현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 거의 알아챌 수 없을 정도로 느린 리듬은 파도의 얕음과 보조를 같이한다. 파도는 단 한 순간도 극적으로 치솟지 않으며 수평선에 보조를 맞추는 횡적 역동 속에 다만 스스로를 절제하며 부드럽게 바닥을 구른다. 이 이미지들의 시퀀스에 관람자가 사로잡혀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더더욱 행성의 궤도들과 바다의 파도들이 하나의 단일한 호흡 운동에서 태어나 맥박치는 것만 같고, 더더욱 우주적인 어떤 것—즉 가장 단순한 운동의 기저에 깔린 기본 원리, 말하자면 들숨과 날숨 운동 같은 상시적인 팽창과 수축—을 상상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와 같이 세상의 만물을 감싸는 호흡은 헤르만 브로흐(Hermann Broch)가 묘사한 바 있다. 브로흐는 밤시간의 자연에 관해 사색한 후 이렇게 썼다. “들숨으로 일깨워진 정적, 들숨으로 채워진 밤, 밤과 고요로부터 자라나는 저 편재함, 잠든 세계의 저 호흡. 어둠은 숨을 내쉬고 점점 더 형상을 이루고 수많은 생명체로 채워졌으며, 그 어느 때보다 땅에 더 가깝게,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그림자를 품은 것으로 변해갔다. (…) 그리고 저 숨쉬는 존재는 밤의 호흡 속을 헤맸고, 그와 함께 헤매는 들판과 텃밭과 양식 역시 숨을 들이쉬었다. 우주의 호흡은 그 생명체를 받아들이고자, 자신을 향한 사랑 속에서 스스로의 형상을 받아들이는 그 생명체를 받아들이고자, 세계의 일원성을 향해 열리었다.”[1]

  • 하지만 김수자 작품의 특별함은 창조에 전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우주의 호흡이나 보편적 원리 같은 관념을 설명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관념을 “거의” 일상적인 관찰로부터 끌어낸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만일에 관람자가 김수자와 그의 카메라처럼 응시하기만 한다면, 마침내 그는 해와 달의 이 결합을 관찰하고, 행성적 궤도들로부터 매달 울려 나오는 이 호흡의 합창과 바다의 운동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호흡이라는 이 근본적 원리는 아주 뚜렷하게 이곳을 그의 전작과 연관 짓는다. 이 새로운 비디오 구성 작품을 보면 김수자의 지난 구성 작품 <호흡(보이지 않는 거울/보이지 않는 바늘)(To Breathe(invisible mirror/invisible needle)>(2005)이 비로소 명확해진다. 이 작품에서 김수자는 자신의 숨소리로 실연한 합창곡과도 같은 사운드를 베네치아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재생했고, 다채로운 색광들은 닫힌 무대 앞에서 신호를 받아 관객 사이를 배회하면서 호흡의 리듬을 바꾸었다. <거울여인: 해와 달>은 또한 <바늘여인—기타큐슈(A Needle Woman—Kitakyushu)>(1999)의 퍼포먼스와도 연관이 있다. 이 작업에서 김수자는 반듯이 누운 자세로 바위에 밀착해 저 호흡하는 지평선의 일부를 이루었는데, 작가는 관람자에게 등을 지고 있어서 관객의 시선을 자신의 시선과 더불어 이동시킴으로써 관객도 먼 곳을 응시하게 할 수 있었다. 1999년에서 2001년까지 이어진 <바늘 여인>의 복잡한 퍼포먼스 역시 이 작업과 연관이 있다. 이 작업에서 김수자는 그의 곁을 물 흐르듯이 스쳐 가는 군중 속에 수직의 부동축처럼 똑바로 서 있고, 만남의 이 단일한 순간은 확장된 시간 속에서 측정되는데, 우리가 <거울 여인: 해와 달>의 행성적 궤도들을 응시할 때 보는 것도 진정 이것, 즉 특정한 하나의 점으로 모여든 서로 다른 시간적 흐름들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 어쩌면 김수자의 <거울여인: 해와 달>에서 상징적인 부분은 다음의 순간일 것이다. 이 비디오 설치 작품의 두 번째 벽면에서 작가는 얕은 파도의 느리고 찬란한 접근을 보여준다. 얕은 파도는 모래밭을 굴러가 넓게 퍼지고, 이내 바닷물이 다시 물러나며 모래밭을 거울로 만들면 햇빛의 이글거리는 점이 거울에 반사되어 비친다. 한없이 부드러운 낮은 파도는 빛의 거울로 가만가만 다가가 그것의 바깥쪽 테두리와 맞닿았다가 이 두 번째 해 위로 살짝 쏟아졌다 물러나고, 이 모든 과정은 이내 다시 시작된다. 이 파도가 모래밭에 퍼질 때의 그 부드러움은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이불보’로 쓰이는 천을 환기한다. ‘이불보’는 물건을 둘둘 말아 다양한 용도의 ‘보따리’를 만들 수 있는, 아름답게 직조하여 장식한 면직물이나 비단으로 된 이불 천을 일컫는 한국어 단어다. 우리들은 이불보 위에서 자고, 이곳에서 생명이 탄생한다. 물품을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또는 여행할 때 이불보로 싸매고, 과거에는 환자를 옮기거나 망자를 덮거나 운반할 때도 이불보를 사용했다. 이불보는 김수자 작품에서 주요한 모티브이지만, 이러한 반사의 이미지와 연관이 있는 것은 이 이불보말고도 또 있다. 무엇보다, 거울도 김수자의 작품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하여 출현하는 요소다. 거울 모티브는 김수자의 설치 작품 <거울여인>(2002)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거울여인>에서는 여러 장의 전통적인 이불보가 넓은 실내 공간 가득히 공중에 매달려 있었는데 벽면에 거울이 부착되어 있어서 수없이 많은 천이 끝없는 공간 속에 재생산되었다. <빨래하는 여인: 인도 야무나 강(Laundry woman—Yamuna River, India)>(2000, 델리)의 퍼포먼스 역시 거울 이미지가 사용된 경우로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작가는 시신의 재를 뿌리는 화장터 강가에 시간의 부동축으로서 서 있다. 그곳으로부터 몇 킬로미터 떨어진 하류 지점에서는 망자가 화장되고, 불에 타지 않아 남은 잔재는 재와 함께 강으로 떠내려간다. 김수자는 관람자들을 등지고 있고, 그의 시선은 관람객들의 눈길을 강과 수평선 너머 저 멀리로 데려가면서 거울의 비유가 성립된다. 강은 언제까지나 흐를 것이지만 예술가는 그 자신의 삶은 그보다 짧음을 의식한다. 이 장면에는 일종의 시간의 도약이 있고, 이 도약은 우리 주변 세계의 관찰로부터 나오고 우주의 법칙에서 정점을 찍는다.

  • 그리고 정확히 이 일은 <거울여인: 해와 달>에서 모래가 씻겨갈 때, 해변에 한가로이 굴러온 파도가 햇빛을 반사하는 거울과 유희할 때 일어난다. 이때 일상적 관점은 궤도 이미지의 시퀀스 안에서 우주의 운동을 꿰뚫어 보는 통찰이 된다. 왜냐하면 이 회화적 공간을 오래 바라보면 볼수록, 파도—어느 순간 거울에 반사된 해와 맞닿는다—의 운동이 해와 달의 유랑하는 궤도 이미지에 새겨져 있다는 것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엇이 그리도 놀라울까? 이 현상은 경계선들에 관한 질문, 즉 파도와 더불어 달과 해, 지구의 운동 및 확장에 제약을 가하는 듯한 힘과 역동의 경이로운 비밀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거듭하여 김수자는 우리 주변 세계에 대한 관찰을 자기 자신의 공간성을 확장하고 창출하는 데 쓴다. 이 공간성은 우리의 이해에서 벗어나 있으며, 우주의 수수께끼와 관련된 문제다. 그 어떠한 신비로운 사고의 연쇄도 유대교(Judaism)에서만큼 풍성한 이미지로 가는 문을 열어주지는 못할 것 같다. 유대교에서 그러한 힘—여기만을 관장할 뿐 그 너머에 미치지는 못한다—의 역동은 하나의 신적 표현, 다시 말해 샤다이(Shaddai)로 간주된다. 우주의 균형을 이루는 힘들을 의미하는 이 용어에는 놀라운 점이 있는데 그것은 카발라교[2]의 관점에서 이 글자들의 수치가 314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수치는 정확히 그리스어 문자로 ‘파이’ 즉 원주율이다. 그리하여 어느 원의 둘레와 지름 사이의 친밀한 관계, 즉 이 원의 바로 그 긴장과 확장에 해당하는 수학적, 초월적 수는 샤다이의 유구하고 신비로운 개념들을 반영한다.[3] 또한 이러한 구형(球形)의 운동은, 김수자의 작품에서 달과 해가 하늘을 유랑하듯 가로지르고 지구의 지평선을 횡단하는 것을 우리가 홀린 듯 바라볼 때, 우주적인 힘이라는 생각과 만난다. 이 지평선은—해의 운동과 마찬가지로—우리 시각의 제한된 범위 때문에 생기는 착각일 뿐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4채널 비디오 설치 작품 <거울 여인: 해와 달>의 이미지에서 또다른 벽면들, 즉 세번째와 네번째 벽면은 해질 무렵 뜨는 달의 불그스름한 은빛에 잠긴 물의 형태를 보여준다. 그중 한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부풀어오르는 바다의 근접 샷을 해안선이나 수평선 없이 담아낸다. 관람자는 영원한 순환 속에 솟아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파도를, 마치 플라이휠을 장착한 양 끊임없이 내보내는 바다의 호흡과 하나가 된다. 네번째 벽면에서는 얕은 파도가 작은 자갈들을 덮치고 부풀어 올랐다가 이내 다시 물러나며 그것들을 놓아준다. 이 자갈들은 흡사 어떤 고정된 표시물처럼, 파도의 운동에 대한 한계선인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도 서로 다른 결합들 간의 만남이 일어난다. 파도의 운동의 끝없는 반복은 동질적인 시간 감각을 부여한다. 대양의 지속적인 수축과 팽창—바다의 호흡—때문에 관람자는 역시나 끝없는 회귀 속에 있는 천체의 순환을 더욱 예민하게 의식한다. 이 이미지 속에서 시간은 명백히 실재한다. 즉, 그것은 지속이다. 그것은 베르그송이 말했듯, 사건들의 계기적(契機的) 차원에 앞서는 “동질적 매체”다.[4] 우리는 여기서 도공(陶工)의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판을 둘러싼 신화들, 즉 창조와 그것의 중단 없는 소용돌이 같은 순환의 원리와 이를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단한 회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도와 아시아의 현자들이 가르치듯[5], 자신의 가장 내밀한 ‘자아’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이 작품 <거울여인: 해와 달>은—형식적 측면보다는 승화의 수준에서—김수자가 오늘날까지 내놓은 전작(全作)을 모두 합친 것에 준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하지만 김수자의 작품들이 이 우월하고 절대적인 현존의 순간—가장 내밀한 ‘자아’로의 집중—을 지속적으로 가져다줄 때 우리는 여기서 김수자의 완전한 자기 억제와 내면의 휴식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그 안에서 정적과 명상은 어느 예외적 상태가 아닌 내면적 태도로서 하루의 매 순간을 관통한다. 같은 방식으로, 김수자의 작품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직접적이고 긴밀한 관찰 속에 단단히 뿌리박고 있다.

  • 이는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해—펼쳐짐(The Sun—Unfolded)>의 사진들이 생성된 방식이기도 하다. 환영적 색채의 마법 같은 원들은 해를 둘러싼 동심원의 형태를 띠는데 마치 광선이 파문처럼 퍼져 나가는 것 같다. <해—펼쳐짐>은 만다라를 연상시키는 이 동심원들의 이름이다. 하지만 김수자의 이 작품에서 독특한 점은 이 사진들이 의도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이 사진들은 고아 해변에서 <거울여인: 해와 달>의 영상을 준비하며 촬영을 개시하려는 찰나에 우연히 촬영되었다. 역설적인 것은 특히 이 사진들이 <거울여인: 해와 달>을 완성하는 듯 보인다는 점이다. 마치 햇빛이 스스로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고, 하나의 파동 같은 호흡 운동 안에서, 우리의 시야를 날마다 밝혀주는 에너지를 펼쳐 보여주는 듯하다.

  • 그리고 흥미롭게도 (김수자가 지금까지 발표한 우주적인 작품들과 비교한다면) 이 다소 우연적인 창작물은 또 하나의 원을 완성한다. 2003년에 김수자는 <거울여인: 그 어디도 아닌 기반(A Mirror Woman: the ground of nowhere)>을 제작했다. 작가는 천장이 뚫린 방에 모슬린 천으로 된 19미터 높이의 흔들리는 기둥을 설치했고, 바닥에는 같은 지름의 원형 거울을 두었다. 한들거리는 모슬린 천을 통과해 걸어 들어간 방문객은 하늘을 내려다보고 자신의 발아래로 구름과 갈매기들이 지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여기에는 마치 우리가 우물 속을 들여다볼 때처럼 세계가 뒤집힌 듯한 놀라운 효과가 있다. 또 한편으로 김수자는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자주 그러하듯이 강제 이주라는 민감한 주제를 꺼낸다. 그것은 발아래에 더이상 아무런 기반도 없는 경험을 살아내는 이민자의 운명이다. 이민자의 유일한 정박지는 오로지 자신의 내면과 하늘에 있다. 그런데 달과 해의 궤도 면에서 뚜렷해지는 또다른 차원이 있다. 그것은 세계의 전체성(wholeness)이 가지는 차원, 즉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Hermes Trismegistos)의 이집트 문헌에서 발견되는 일원성(oneness)의 관념—“저 위에 있는 것은 저 아래에 있는 것과 동일하며 저 아래에 있는 것은 저 위에 있는 것과 동일하다”[6]—이 가지는 차원이다. 이 생각의 흐름이 본질적으로 말하는 것은 모든 것은 ‘하나인 존재(The One)’로부터 나왔고 ‘하나인 존재’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사상은 플라톤이 글을 남긴 고전고대 시기에서 메디치 가문의 르네상스 시기를 거쳐 계몽주의 그리고 라이프니츠 등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타당성을 인정받았다. 이 사상은 인간과 우주의 체계적인 이미지에 대한 탐색에서 오늘날 또다시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다. 동양의 이슬람교와 힌두교 그리고 불교에서 일원성의 관념은 언제나 영적 이미지의 중심에 있었다. 이 철학이 여기에서 강조되는 이유는 그것이 <해—펼쳐짐> 시리즈에서 그 자신의 아이콘을 발견하는 듯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기묘하게도 이 원들은 라이프니츠가 ‘하나인 존재’의 철학을 정립할 당시 그린 그림들과 동일하다.

  • <해—펼쳐짐> 작품에서 동심원 형태를 띠는 빛의 파문들은 또한 김수자가 마드리드의 크리스탈 궁전(Palacio De Cristal)에 설치한 <호흡—거울 여인(To Breathe—A Mirror Woman)>에서도 하나의 원을 완성한다. 유리벽에서 유리벽으로 바닥 전체가 거울로 덮인 이 작품에서는 아치형의 높은 유리 천정의 건축물이 방문객 발아래에서 스스로를 반복하고, 바닥이 없는 이중화된 차원의 공간 속에서 우리의 몸은 하나의 진자가 된다. 궁전의 돔 전체가 빛을 굴절시키는 투명한 코팅 막으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그 가없는 내부 공간에서는 다채로운 빛—교회 건물의 창에서 흔히 보는—이 춤추듯 빙글빙글 돌고 환영적 색채의 수천 겹의 반사의 흔적들이 자국이 방문객을 흠뻑 적셨다. 이곳에서도, 공간은 작가의 숨소리—기쁨에서 차분함, 의심, 불안을 지나 되찾은 확신에 이르기까지 여러 다른 정서 상태에 따라 변화하는 리듬—로 가득찼다. 그 숨소리는 방문객이 부지불식간 그 자신과 그 자신의 호흡으로 돌아가도록 만든다. 바로 이 점이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는 김수자의 작품만의 독특함이다. 관람자는 회화적 공간 속에 통합되고 친밀한 대화가 관람자와 예술 작품을 하나로 엮는다. 그리고 예술가는 스스로가 보이지 않게 만들 방법을, 자신의 경험을 관람자에게 이동시킬 방법을 안다. 그리고 정확히 이러한 일이 <거울 여인: 해와 달>에서 일어난다. 작가는 달의 궤도와 해의 궤도 사이의 영점에 위치해 있고, 그곳은 공간의 접합점에 자리한 하나의 장소, 분리 벽으로 사용된 의식을 발생시키는 거울에 자리한 하나의 장소가 된다. 그곳에서 예술가는 불가능한 것을 보고, 자신의 시야를 우주로 확장하며, 초월을 향한 의식을 감지하는 자신만의 감각을 강화할 수 있다. 이 절대적 현존의 순간에는 윤리적 차원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고, 이 절대적 자유는 영토의 포기를, 소유로 규정되는 정체성의 포기를 요구한다. 즉, 그것은 완전히 그리고 절대적으로 ‘자아’에 집중하는 자각을 요구한다.

  • *독일어 원문을 파울리네 엘젠하이머(Pauline Elsenheimer)가 영어로 번역.

  • [Notes]
    [1] Hermann Broch, Tod des Vergil, Frankfurt, 1976, p.212 "Atmungserweckt die Stille, atemerfüllt die Nacht, wuchs aus Nacht und Stille das immer Vorhandene, der atmende Weltenschlaf. Aufatmete die Dunkelheit, wurde gestalteter und gestalteter, kreatürlicher und kreatürlicher, irdischer und irdischer, wurde schattenreicher und schattenreicher. (...) Das Atmende durchwanderte den Atem der Nacht, mitwanderten Feld und Garten und Nahrung, mitatmend auch sie, und der All-Atem öffnete sich die Kreatur zu empfangen, öffnete sich zur Welteneinheit, die liebeempfangend die eigene Gestalt empfängt."
    [2]카발라교(cabalism)는 유대교의 신비주의 교파다—옮긴이.
    [3] Marc-Alain Ouaknin, Mystères de la Kabbale, Paris, 2000, p.369 cf Gershom Scholem, Die jüdische Mystik in ihren Hauptströmungen, Frankfurt, 1980, p. 152.
    [4] cf Henri Bergson, Zeit und Freiheit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 Frankfurt, 1989, p.76.
    [4] cf Jean Chevalier and Alain Gheerbrant, Dictionnaire des Symboles, Paris, 1969, Vol. 4, p.119.
    [6] Hermes Trismegistos, "Verfertigt von von Alethophilo", 1786, Stuttgart 1855, p.51.

  • — 『거울여인 – 해와 달』, 2008년 도록 수록 글,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홍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