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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적 공감

메리 제인 제이콥

2013

  • 김수자는 자기 그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준다. 김수자는 자신의 예술을 통해 그렇게 한다—이는 단순히 김수자가 예술가이기 때문이 아니라 김수자는 예술을 통해 타자에게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와 관람자 사이의 이 교류에는 보상이 따른다. 이 교류로 우리는 인간적 소통의 본질에 접근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 일부분인 더 큰 실재에 본질적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사람과 여러 영역 사이의 교감을 이끄는 김수자의 여정을 따라갈 것이고, 그리하여 이 에세이의 초점은 공감이 될 것이다.

  • 우리가 김수자의 작품을 보고 작품 속에 서 있는 그를 목격할 때 우리는 김수자의 살아 있음을 경험하며, 우리 자신의 생기를 감지하는 동시에 김수자의 생기를 함께 느낀다. 김수자의 예술은 우리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김수자가 우리 앞에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또한 김수자 너머를, 그리고 우리 자신 너머를 본다. 바람 속에 현존하는 김수자의 존재, 해와 달과 현존하는 그와 더불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감지한다. 김수자는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재현된 무언가를 창출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세계와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 스스로 우리 존재의 상태를 알아챌 수 있도록 한다.

  • 이같은 방식으로 김수자는 문화가 항상 해온 일에 참여한다. 그 문화생산자들의 이름이 우리에게 늘 전해지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개개인들을 알아보지 못한 채 지나간 사회들을 칭송하게 한다. 하지만 김수자가 오래 지속되어 온 사회의 관습이나 집단의식을 문제 삼을 때, 우리는 그의 이름을 안다…… 아니, 정말로 알까? 김수자는 스스로 그의 예술이 되기 위해 의식적으로 그 자신으로부터 걸어 나와 한 단어로 된 이름을 택한다. 이 이름은 “가계의 이름과 개인의 이름을 분리하지 않음으로써 젠더 정체성, 혼인 상태, 사회-정치적 또는 문화적 정체성, 지역적 정체성을 거부”한다[1]

  • 예술을 존재(being)의 방식으로—또는 더 정확하게는 되기(becoming)의 방식으로—만드는 것은 예술을 하나의 여정으로 지각하는 것이다. 예술은 또한 우리가 공유하는 여정을 상기시키는 것일 수 있고, 이 점에서 종교나 철학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러한 분야와 달리 오직 예술만이 하나의 경험이 될 수 있고, 이러한 일은 지면 위의 단어들을 통해서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술은 일상 영역과 영적 영역의 연결, 감각으로 지각되는 것과 마음으로 감지되는 것의 연결을 설명하는 이상의 일을 한다. 예술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융합하여 하나가 된다. 이처럼 궁극적인 의미를 목표로 삼아 예술을 하는 것은 히브리스(hubris)[2]를 범하는 것(고대 그리스인은 이 행위를 처벌의 대상으로 보았다)이고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위험한 노력이다. 이러한 생각은 에세이에는 위태로운 시작일 수 있겠지만, 김수자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다. 김수자의 야망은 그 이하를 허용하지 않는다.

  • 철학자나 신학자처럼 예술가는 일상을 더 큰 어떤 것, 즉 관념, 가치, 비물질적인 것과 맺는 관계를 이해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예술은 그저 직업적 책무가 아니다. 이 일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하는 일이고, 태초부터 줄곧 해온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자 살아가야 하는 방식이다. 각 세대, 각 개인은 삶에서 의미를 발견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의미 없이 삶을 살아가야 한다. 김수자에게 삶의 의미는 지금 여기, 그리고 이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는 것, 둘 다와 관련된다. 의식은 자의식을 앞지른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영적”이라는 말은 동시대 미술을 하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종교적”이거나 “뉴에이지” 같은 개념을 떠올리게 하고, “무의식적”은 심리학이 탄생한 20세기 초에 기원을 두고 있다. 물리적 세계 너머의 것, 혹은 저 세계의 것, 혹은 미지의 것의 애매성은 이 영역이 대체로 논의에서 배제되거나, 암묵적으로 언명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보편적”이라는 단어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의해 이 추방되었다. 전 인류를 대표한다는 주장은 총체화하는(totalizing) 개념이어서 이 단어의 사용을 의심하게 하며, 사회적⸱문화적 차이가 더욱 복잡다단해 지면서 보편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금기시된다.

  • 동양의 철학과 종교,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김수자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분명히 이들 사상은 김수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본질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이 이에 관해 전문적인 글을 썼고 이 논의는 김수자의 예술을 고찰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이야기해야 할 더 많은 것이 있다. 이는 단지 김수자가 여러 문화를 교차하며 거주하고 작업하는 우리 시대의 인물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동양 사상과 서양 사상 사이에는 수 세기동안 풍부한 상호 교류가 있어 왔기 때문이다. 이렇듯 김수자의 작품은 동양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3]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그의 작품을 도가와 불교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서양 철학자 존 듀이의 실용주의의 렌즈를 통해 볼 것을 택했다.[4] 우리는 듀이로 눈을 돌리면, 삶이라는 여정의 전체성을 탐구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인문주의자의 사상을 접하게 된다. 그는 김수자와 마찬가지로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고 믿었고 예술은 이를 성취하는 가장 의미있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 듀이가 보기에, 높고 낮음으로 삶을 분할하거나, 범속하거나 영적인 것, 물질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으로 가치를 범주화하는 것은 사물의 본성을 배반하는 일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듀이는 우리의 일이나 관심을 분리하는 것—통찰로부터 실천을 분리해내고, 행위로부터 상상을 분리해내며, 노동으로부터 의미 있는 목적을 분리해내는 것—은 인간의 본성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김수자의 작업에서처럼, 이것들이 합쳐져 하나가 될 때 우리는 “내재적 의미의 깊은 실현”과 “그것들의 내부와 배후에 자리한 실재에 대한 감각”을 경험할 수 있다. 이는 그것들이 “하나의 공통적인 더 큰 이야기”를 말하기 때문이다. 듀이가 믿었듯이 관념적인 것은 구현되고 실현될 수 있으며,[5] 이때 마음과 몸, 영혼과 물질의 구별은 사라진다.

  • 듀이에게, 일상 세계와 그보다 거대한 어떤 것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이 감각은 경험과 더불어 오지만 이는 단지 긴 세월을 산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이 감각은 우리가 성찰적이고 의식적인 방식으로 삶을 살 때 경험과 더불어 온다.[6] 김수자에게 그의 몸은 매체이자 도구로서 단지 표현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의식적인 경험을 제공한다. 그리고 듀이가 굳게 믿었고 김수자가 예증하듯이, 우리는 감각과 우리 자신의 몸을 이용하여 “영적이고 영원하고 보편적인” 것에 곧바로 접근할 수 있다.[7] 도가 사상에서 이러한 영역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생명의 에너지로 이해되며, 듀이에 따르면 우리는 이 에너지를 예술을 통해 알 수 있다.[8] 예술은 지상의 것과 영원성 사이의 연속성을 생성하므로, 예술이 산출한 살아 있음과 생기는 삶의 경험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 따라서 우리는 예술 경험(그리고 듀이에게 예술은 어떤 독립체나 대상이라기보다 어떤 경험이다[9])을 통해 영적, 비물리적 세계와 접촉한다. 하지만 모든 경험이 통찰이나 연속성을 갖는 것은 아니듯, 모든 예술이 물질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의 통합을 이룩하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김수자의 작품을 보면서 듀이가 한 다음의 말을 이해할 수 있다.“예술 작품이 일으키는 감응의 깊이는 이 지속적인 경험의 작용과 예술 작품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작품과 그것이 일으킨 감응은 바로 삶의 과정과 연속적이기 때문이다.” 김수자의 작업은 이 철학자가 “예술적 몰입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운 측면, 이는 종교인들이 말하는 황홀경의 교감과 경험적으로 매우 유사하게 만드는 요소”라고 부른 것과 관계가 있다. [10]

  • 의식적으로 살아 있는 경지는 사물들을 미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듀이에 따르면, 이러한 일은 우리가 제작 경험과 지각 경험 안에 오롯하게 전적으로 현존할 때 발생하지만, 이것은 예술 행위에서만이 아니라 삶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11] 듀이에게, 미적인 또는 예술적인 방식으로 잘 산다는 것은, 김수자에게도 그렇듯이, 의식적이고 열려 있으며 깨어 있는 것이다. 무언가가 되기 위한 상태로 끊임없이 진화하는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자각(自覺)을 실천해야 한다. 듀이의 사상 체계에서는 각 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지는 동시에 사회를 발전시키는 책임도 가진다고 제안하며, 실천이란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에서 깨어있는 개인이라는 개념은, 불교의 ‘부처의 마음’ 개념과 연결되며, 이는 일상의 행위와 깨달음을 의 추구하는 것이 동일한 길이라는 입장을 존중한다. 그러나 불교와 도가의 사상에서는 이것이 명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반면, 듀이는 예술을 대안적 방법으로 제안했다. 듀이의 견해에 따르면, 실천의 대상으로서 예술 작품은 자아실현을 위한 길이 될 수 있다.

  • 이 여정은 타자에 대한 이해를 포함한다—우리는 예술을 경험하는 가운데 타자를 경험할 수 있다. 어느 단계에서는 예술 작품을 보는 가운데 타자의 느낌을 공유할 수 있고, 우리는 이것을 흔히 공감이라고 부른다. 또 다른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예술 안에서 타자와 함께 있을 수 있고, 우리는 이것을 인류애의 경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듀이는 사회적 과업을 떠받치는 기반은 언제나 공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듀이는 예술을 경험하는 것은 재-창조 행위이므로 예술에는 이 공감적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엄청난 역량이 있다고 보았다.

  • "예술 작품은 우리가 상상력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통해 우리와 다른 형태의 관계와 참여에 들어가는 수단이다. (…) 우리가 예술 작품을 이해하는 정도는, 우리가 단지 그 작품이 나온 조건에 관해 얼마나 많은 정보를 수집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많이 그 작품을 우리 자신의 태도의 일부로 만드느냐에 비례한다. 우리는, 베르그손의 용어를 빌리면, 우리 자신을 일견 낯설어 보이는 본성을 이해하는 모드로 있을 때, 이러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 통합을 꾀할 때 우리는 어느 정도 스스로 예술가가 되며, 이 과정을 통해 우리 자신의 경험은 재설정된다. (…) 우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녹아드는 이 변화는 이성적 추론으로 일어나는 변화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이 변화는 태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12]

  • 이것을 김수자의 예술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집 없는 여인—카이로(A Homeless Woman—Cairo)>(2001)에서 그때까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던 인간의 조건을 몸으로 몸소 보여주고 있는 김수자를 보고 행인이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생각할 때 이 행인에게 ‘집 없는 여인’은 관심의 대상, 더 나아가 연민의 대상이 된다. <구걸하는 여인(A Beggar Woman)>에서 이 예술가는 델리(2000), 멕시코시티(2000). 카이로(2001), 라고스(2001) 거리의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구걸하는 여인—타임스스퀘어(A Beggar Woman: Times Square)>(2005)에서는 이 작업이 다른 방식으로 보여지기도 했다. 언론에서는 이 작품을—그 도시의 진정으로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모욕적인 행위로—오해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우리는 이 작품을 보고 다음의 질문들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어떻게 빈곤에 관심을 모을까? 우리 마음속에 타자의 배고픔을 새긴 채 어느 도시의 전역에서, 단지 한 도시에서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서도, 우리가 그들을 경험할 수 있을까? 빈곤한 이들을 인정하는 것은 단지 일방적인 것일까? 누가 “도움이 필요”한가? 누가 그 자리에 있는가?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내주는가?

  • 당신이 아무것도 주지 않는데도 노숙인이 당신에게 문득 말을 건넨 한 순간이 오래 마음 속에 남아있었던 적이 있는가? 아마도 당신이 노숙인에게 돈을 주고 감사 인사를 들은 순간은 기억에 그리 오래 남아있지 않았으리라. 이 작품에서 김수자의 궁핍하지만 너그럽고, 괴로우나 현명한 손은 무언가를 받는 동시에 무언가를 내미는 동작을 취하고 있다.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기독교 등의 여러 종교적 전통의 실천에서 자선은 주기와 받기 둘 다를 통해 드러나며, 이 연관되는 행위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13]

  • 김수자의 다른 공감적 작품들은 추모의 형식을 띠었다. 그 시작은 1995년의 <바느질하며 여 걷기—광주 희생자들에의 헌정(Sewing into Walking: Dedicated to the Victims of Gwangju)>이었다. 이 작품에서는 과거에 비극이 발생한 산기슭에 사람들을 대신하는 옷가지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는 훗날 대통령 자리에 오른 전두환의 폭거에 저항하다 죽임을 당한 2천여 명의 사람들에 대한 추모이자, 이 땅을 치유하는 행위였다. 이 비극이 시작된 날짜인 5월 18일을 상징하는 숫자 ‘5‧18’로 불리는 이 사건은 훗날 9/11이 있은 후 김수자가 마음을 내어 다정한 추도의 몸짓을 선보이면서 유사성을 보여준다. <묘비명(Epitaph)>(2002)에서 김수자는 뉴욕의 스카이라인이 보이는 그린론 묘지에서 이불보 하나를 펼쳤다. <만다라—아우슈비츠를 위한 성가(Mandala: Chant for Auschwitz)>(2010)에서는 예전에 히틀러가 썼던 폴란드 포잔의 사무실 바닥에 광주에서처럼 옷가지들을 원의 형태로 펼쳐 놓았다. <뭄바이—빨래터(Mumbai: A Laundry Field)>(2007~08)에서는 네 대의 스크린에서 물처럼 흐르며 펄럭이는 갖가지 색채와 형태의 천이 “인간의 현존과 우리 모두에 관한 질문들”[14]을 표상하면서 그 장소뿐만 아니라 수많은 장소에서 일어나는 더 넓은 생명의 순환을 창출한다. 이 전시에서 김수자는,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랬듯이, 고대 양식의 만다라를 우주의 상징으로, 또 주의를 집중하고 세속을 초월한 영역과 접촉하기 위한 실천의 매개체로 활용한다.

  • 옷가지들이 만들어낸 카펫은 훗날 <심겨진 이름들(Planted Names)>(2002)에서 새로운 방식의 카펫으로 이어졌다. 네 장의 카펫은 배에 빽빽이 줄지어 태워진 뒤 ‘미들 패시지’(Middle Passage)[15]를 통과해 마치 광활한 카펫과도 같았던 옛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벼를 줄지어 심은 흑인 노예들을 추모한다.[16] 이 작품보다 한 해 앞서 김수자는 나이지리아에서 겪은 경험에서 일부 영감을 받아 <보따리—알파 해변(Bottari: Alfa Beach)>(2001)을 제작했다. 이 작품에서 바다는 하늘 위에 있다. 이 역전은 김수자가 말한 “노예들의 운명과 그들의 박탈된 자유를 생각하니, 내가 살면서 본 가장 슬픈 선(line)”에 대한 공감적 감응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이 뒤집힌 수평선은 교란된 수평선이자, 중력의 방향이 뒤바뀐 듯한 감각이며, 과거에 노예들이 떠난 바로 그 해변에 굽이치며 다다르는 파도를 보며 내가 지각한 그들의 심리적 귀향의 수평선이었다.”[17]

  • 김수자는 물과 연관된 여러 요소들을—정화와 씻음, 자궁의 깊이와 우주의 광활함, 달의 주기와 심지어는 마음—을 포용한다. 도가 사상에서 말하듯 유동성은 기의 흐름이며 필연적으로 무상(無常)하다. <경작된 이름들>과 나란히 전시된 <등대여인(A Lighthouse Woman)>(2002)에서 김수자는 바닷물로 둘러싸인 거대한 바늘 모양의 오브제를 통해 바다가 품은 고통의 역사를 응시하는 목격자를 제시했다. 등대에 비치는 아홉 가지 색조로 구성된 한 시간 길이의 반복적 시퀀스는 이 빛을 받은 오브제가 마치 숨을 쉬고 있는 듯한 변화를 일으켰다. 각각의 색조는 등대를 물들이다 이내 흘러내려 색의 웅덩이를 이루었다. 관람자들은 오랜 시간 이 작품을 보며 시간의 목격자로써 이 작업에 참여했다. 그들은 <등대 여인>을 경험하는 가운데 관념으로서가 아니라, 듀이가 말한 것처럼, “영적이고 영원하고 보편적인 것”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는 자신들의 개인적 감각을 통해 공감을 경험할 수 있었다. 공동의 방문이었기에 이 경험은 또한 교감이기도 했다.

  • 이 작품들에서는 역사적⸱지리적 레퍼런스가 사용되고 예술가가 영민하게도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형식을 선택함으로써 공감은 실재적인 것이 되었고, 더 나아가 하나의 타자로 현현되었다. 이 작품들을 지각하는 가운데 우리는, 듀이가 묘사한, 오랜 세월을 지나온 인류의 더 넓은 이야기를 비로소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의 투쟁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문화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일이고, 비록 우리는 듀이의 세대보다 문화적 차이에 대해 더 비판적이고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듀이가 남긴 다음의 말에는 일부 진실이 있다. “다른 문화의 예술이 우리의 경험을 규정하는 태도 속에서 진정한 연속성이 생겨난다. 그리하여 우리의 경험은 자신의 개인성을 잃지 않은 채 의미를 확장하는 요소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과 결합한다.”[18] 이때 경험은 “자아와 사물과 사건의 세계가 완전히 상호침투”한 것이 되어 “참여와 소통”으로 탈바꿈한다.[19]

  • 김수자의 작업에서, 특정한 순간과 상황에 대한 공감은 인류라는 더 큰 일체감으로 이어진다. 이는 우리가 김수자의 대표작 <바늘여인(A Needle Woman)>에서 갖는 경험이다. 1999년에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우리 자신과 타인의 유동성이, 즉 시간에서 시간, 또 공간에서 공간으로 하나가 되는, 시공간 속으로 흘러 일체화된다. 김수자는 바늘인 동시에 우리가 통과하는 바늘귀다. 그는 우리의 시야를 여는 열쇠인 동시에 바로 그 순간 우리가 통과하는 열쇠 구멍이다. 김수자는 구체적인 형상이었다가 스스로를 비우면서 그림자가 되어 양쪽을 물흐르듯이 오간다. 그리하여 <바늘 여인>에서 우리에게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우리는 관객인 동시에 참여자가 되어 그 장면을 바라보고 그 장면 속으로 들어가며 타인들이 오고 감을 보면서 그 흐름 속에 동참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온전한 참여는 곧 예술의 경험을 통한 변화다.

  • <바늘여인>에서 김수자는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익명으로 남는다는 언급을 자주 접한다. 하지만 이 선택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프레임 안의 예술가와 모든 사람들은, 프레임이 씌워지지 않은 더 큰 전체—모든 것, 모든 장소를 의미한다. 우리는 예술가가 한 말에서 이를 이해할 수 있다. “저는 예술가로서의 야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을 끝까지 소진하여 마침내 나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예술가일 필요가 없고, 다만 자족적인 존재, 즉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무(無)의 상태일 것입니다.”[20] 그리하여 김수자는 타자의 경험과 이야기,나아가 인류를 뛰어넘는 더 큰 영역의 경험을 추구한다.이 일을 할 때 예술은 목표가 아닌 과정으로, 온전한 자기실현을 이루는 수단으로 인식된다.

  • 도가 사상에서는 태초에 인간의 마음은 순수한 공허함(虛)이고, 이 공허함 안에 모든 잠재력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마음은 자각을 통해 이 공허함, 즉 비어 있음의 상태로 돌아가고, 다시 그 일부가 되어 우리를 우주로 연결한다. 통찰의 순간에 모든 사물과 우리는 하나됨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실재를 재현하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존재의 상태다. 이 모두를 아우르는 실재는 우리의 일상적 자아와 연결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아니, 더 나은 표현으로는, 그것은 이미 우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김수자가 “끝까지 소진”됨을 말할 때 그는 그 전체성에 참여하며 그것과 하나다. 다차원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예술은 공감적 본질을 가진다. 이것은 타자의 감정과 접촉하는 것을 넘어서는 진정한 동일시, 즉 존재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 곤살로 오베예이로(Gonzalo Obelleiro)는 이러한 수준의 공감을 “상상적 공감”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감정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본질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오베예이로는 상상적 공감의 교육학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듀이의 경험 철학이 유용하다고 여긴다.[21] 듀이는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예술의 실질적인 사회적 역할, 즉 공감적 인식 상태를 만드는 것 외에도 예술을 통한 상상력이 사회적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22] 하지만 상상은, 예술에서도 그렇고 일반적인 용어로도, 경험의 진실이라는 의미보다는 공상의 나래라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된다. 그래서 나는 정서의 본질에서 발견되는 이 공감을 “본질적 공감”으로 바꾸어 말하는 쪽을 택한다.

  • <바늘여인—기타큐슈(A Needle Woman: Kitakyushu)>(1999)에서 예술가는 어느 산의 벌거벗은 바위 위에 누워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놓인 그녀의 부동성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자연과 인간, 지상과 천상 사이의 모든 것이 덧없음을 인식하게 한다. 자아를 넘어, 김수자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적속에서 자연의 리듬에 맞춰 호흡하는 내 몸이 그 자체로 자연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질적이고, 중성적이고, 초월적인 상태로서 말이다. 나에게 이것은 내 몸을 자연에 바치는 예식이나 다름없다.”[23] 마찬가지로 <빨래하는 여인—인도 야무나 강(Laundry woman: Yamuna River, India)>(2000)에서도 우리는, 김수자가 그랬듯, 비슷한 일원성을 경험한다. 화장터에서 강 아래를 바라보며 그는 덧없는 것이 영원한 것과 합쳐지는 장면과 마주한다. 김수자는 이 통과의 순간을 재현하거나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각이라는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로 획득한다. 그리고 그것을 얻었을 때 김수자는 “가만히 있는 이 몸 앞에서 강은 항시 변화하고 있지만, 강이 거기에서 지금 모습 그대로 여전히 느리게 흐르는 동안 변화를 겪고 곧 사라질 것은 결국 내 몸이라는 것을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고 말한다.[24] 우리는 우주의 강에 떠가며, 우리의 삶은 유동적이고 언제나 변화한다. <바늘 여인>에서 그랬듯이, 김수자는 이미지 속에 있지만 이내 그것으로부터 증발하여 우리가 들어갈 공간을 열어준다. 김수자는 관람자인 우리가 자각한 상태를 일별하게 해준다. 우리는 처음에는 자각한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보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의식과 현존의 더 깊은 상태를, 그러니까 김수자와 융합하고 하나가 되는 기회를 얻고, 마침내 작가 대신 우리 스스로 참여한다. 그리하여 김수자의 작품은, 시대를 초월한 강력하고 신성한 사물들처럼, 본질적 공감의 상태에 대한 재현이 아닌 그 상태로 가는 수단이다.

  • 듀이에 따르면, 지각적 인식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우리의 행동이 다른 집단, 즉 인류와 우리의 행성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우리가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행성적(planetary)”이라는 단어를 생태 및 환경적 관리자 측면에서 생각하지만, 듀이는 이 말을 덜 구체적인 방식으로도 생각했다. 듀이는 우리 개개인이 더 큰 전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탄력적인 의식의 그물망 모형을 창안했다. 이 그물망은 공존 속에서 예민하게 감응하며 유연한데, 이는 ‘인드라망’으로 상상된 불교의 상호연결성 개념을 환기한다. 인드라망에서 모든 사물은 전체의 부분이고, 각 사물은 전체를 반영하며, 각 사물은 다른 모든 부분과 영향을 주고받는다. 사회적 선(善)에 도달하기 위한 인간의 성장을 이끄는 데 있어서 예술이 유용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던 듀이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예술의 탁월한 능력에 주목했는데, 인간의 조건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바람의 여인(A Wind Woman)>(2003) 같은 작품에서 김수자는 스스로 자연이 된다. 그는 한국의 원자력 발전소 현장에서 <지-수-화-풍(Earth—Water—Fire—Air)>(2010)을 선보였다. 인도 고아의 해변에서 촬영된 <거울여인ㅡ해와 달(A Mirror Woman: The Sun & the Moon)>(2008)에서 김수자는 해와 달이 하나가 되는 일식의 순간을 표현했다. 누군가는 예술가가 이들 작품 속에서 부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모든 것과 오롯이 현존한다. 도리스 폰 드라텐(Doris von Drathen)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으로 이 작품을 설명했다. 드라텐은 이 작품에서 예술가가 점유하는 공간은 “분리 벽으로 사용된, 의식을 발생시키는 거울”이며 이 거울로 “예술가는 불가능한 것을 보고, 자신의 시야를 우주로 확장하며, 초월을 향한 의식을 감지하는 자신만의 감각을 강화할 수 있다. 이 절대적 현존의 순간에 윤리적 차원이 드러나는데” 이것은 곧 “소속으로 규정되는 정체성의 포기”이자 “온전하고 절대적으로 ‘자아’에 집중하는 자각”이라고 썼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참여자가 되는데, “바다가 파도를 일으키고, 그 파도가 영원한 순환 속에서 높아졌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동안 관람자는 바다의 쉼 없는 호흡과 어우러진다. (…) 관람자는 끝없는 회귀를 똑같이 반복하는 천체의 순환을 받아들인다.”[25] 우리의 완전한 존재는 우리보다 더 큰 어떤 것과의 이 같은 연결을 요구한다.

  • 예술가는 통찰을 가지고 통찰력이 넘치는 예술 작품을 만들 수 있다. 우리에게 지각력이 있다면 예술을 통해 통찰의 순간들을 일별하게 한다. 그런데 예술 그 자체가 통찰인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김수자가 우리에게 그 자신을 내어주고, 혹은 우리가 그의 예술에 우리 자신을 내어주고 거기에 온전히 참여하면서 경험할 때에, 일원성, 듀이의 용어로, 연속성을 구현하게 되며, 이 때에 바로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 이것은 듀이가 선택한 단어이지만[26] 오늘날의 예술에서 이 단어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다. 우리는 예술 오브제와 함께 참여하고 이를테면 협업적 저작(collaborative authorship) 같은 제작 형식을 띠는 참여 방식으로 관람자를 연관시키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능력을 잃었다. 관객이 된다는 것은 거리를 두는 것을 의미하며, 사물이나 행동의 겉모습만을 보는 것을 함축한다. 이 시대 서구의 삶에서 스펙터클 사회는 일종의 피상적이고 매개된 관계다.[27] 관객은 공감하지 않지만, 참여자는 공감한다. 그리고 우리는 참여자가 되어야만 김수자가 경험하는, 그리고 그의 예술이 되는, 본질적 공감의 또 다른 차원에 함께할 수 있다.

  • 김수자의 작품에 참여하기 위해 꼭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앉아 있거나 그와 함께 인도의 해변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참여는 우리가 미술관의 영상 앞에 서 있는 동안에 일어날 수 있다. 김수자의 예술은 특이하게도, 듀이가 설명한 예술 경험을 되살려내고, 이 경험의 차이는 그 예술과 함께 존재함으로써 만들어진다. 우리가 관객이 예술가의 경험, 타자의 경험, 공감의 본질과 공감적 관계를 맺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참여자로서 함께하고 공감한다. 이처럼 참여도가 높은 관객은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그 순간에 집중하여 개입한다 [28] 예술가와 관람자의 이 평행성은 너무나 본질적인 것이기에 우리는 예술을 경험하면서 “스스로 예술가가 된다.”[29] 김수자는 그의 예술로 우리에게 이 가능성을 제시해준다. 우리가 온전히 참여한다면 그 경험은 우리의 것이 된다.

[각주]
[1] http://www.kimsooja.com/action1.html를 참조(2013년 3월 13일 접속).
[2] 그리스 비극에서 신의 영역을 침범하려는 인간의 지나친 자신만만함이나 오만함을 일컫는 말—옮긴이.
[3] 메리 제인 제이컵의 김수자 인터뷰. Jacquelynn Baas and Mary Jane Jacob, eds., Buddha Mind in Contemporary Art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4), pp. 212–19.
[4] 더 넓은 영역을 다루는 일에서, 듀이가 옹호한 철학은 “그 모든 불확실성, 신비, 의심, 불완전한 지식 안에서 삶과 경험을 받아들이고 이 경험이 그 스스로를 향하게 하여 자신의 질성(qualities)을 더 깊고 더 강도 높은 것으로 만들게 하는—즉, 상상과 예술을 향하게 하는” 철학이었다. John Dewey, Art as Experience (1934; New York: Penguin, 2005), p. 35. 듀이가 동양 철학과 맺은 개인적 연관성에 관한 논의는 필자의 다음 에세이를 참조하자. “Like-Minded: Jane Addams, John Dewey, and Laszlo Moholy-Nagy,” in Mary Jane Jacob and Jacquelynn Baas, eds., Chicago Makes Modern: How Creative Minds Changed Society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2), pp. 23–25.
[5] 같은 책, pp. 21, 28.
[6] 듀이는 이렇게 썼다: “예술의 존재가 그 구체적인 증거다 (…)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확장하려는 의도로 자연의 물질과 에너지를 이용한다는 증거다. (…) 예술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따라서 의미의 평면에서, 생물체의 특징인 감각‧욕구‧충동‧행위의 통합을 회복할 역량을 지니고 있다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증거다. 의식의 개입은 여기에 규칙과 선별 능력, 경향을 더한다. 따라서 그것은 예술을 끝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시킨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이 개입은 또한 의식적 관념으로서의 예술의 관념(idea)으로 이어진다—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적 성취다.” 같은 책, p. 26.
[7] 같은 책, p. 32.
[8] 듀이는 이렇게 썼다: “인간을 예술을 이용하는 존재로 보는 생각은 인간을 나머지 자연과 구별하는 근거인 동시에 인간을 자연에 결합하는 근거가 되었다. (…) 예술은 그 자체로 물질과 관념의 통합이 실현되었고 그렇기에 이 통합은 실현 가능하다는, 이 통합은 존재한다는 최선의 증거다. (…) 의미와 가치는 그 자체로는—즉, 추상적으로는—‘관념적’이나 ‘영적’으로 지칭될 테지만, 즉각적인 감각 경험은 이러한 의미와 가치를 자기 안으로 흡수할 수 있으며 이 역량에는 한계가 없다.” 같은 책, pp. 26, 29, 28.
[9] 같은 책, p. 344.
[10] 같은 책, pp. 28-29.
[11] 여기서 우리는 누군가가 어떤 일에 온전히 몰두해 있어서 “그 프로젝트를 살고 있다(living the project)”고 말하는 때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가 매 순간이 새로운 삶의 순간에 현존하면서 자신이 지금 하는 일과 과제의 능숙한 수행에 주의를 기울이고 흥분을 느끼는 모습에서 이를 목격한다. 듀이는 이것을 미적(esthetic)이라고 불렀다. 일례로 듀이는 이렇게 썼다: “낚시꾼은 잡은 물고기를 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가 낚싯줄을 던지고 놀며 경험한 미적 만족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에서 훌륭하거나 미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바로 제작하고 지각하는 경험 속에 삶이 얼마나 많이 깃들어 있는가에서 나온다. 그 대상이 실제 사용을 위해 제작되는지 아닌지는, (…) 본질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 그 생명체에게 생산 행위가 온전히 살아 있는 경험, 즐거움을 통해 자신의 삶을 소유하는 경험이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조건이 있을 때, 그 생산물에는 미적인 어떤 것이 결여되어 있을 것이다. 그 생산물은 어느 특수하고 제한된 목적에는 제아무리 유용하다 할지라도, 궁극적인 단계—확장적이고 풍부한 삶에 아낌없이 직접 이바지하는 단계—에서는 유용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책, p. 27.
[12] 같은 책, pp. 347-348. 이는 듀이의 다음 전제에서 나온다: “재창조 행위가 없다면 그 대상은 예술 작품으로 지각되지 않는다.” 같은 책, p. 56.
[13] 다음을 참조하자. http://www.dharmasculpture.com/buddha-varada-mudra-sanskrit-boon-granting-charity-hand-gesture.html.
[14] Rosa Martinez, “A Disappearing Woman,” in Kimsooja: To Breathe (Seoul: Kukje Gallery, 2012), p. 22.
[16] <심겨진 이름들>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드레이턴 홀에서 제작‧전시되었고 필자의 의뢰로 2002년 미국 스폴레토 페스티벌(Spoleto Festival USA)에 출품되었다. 흥미롭게도, 이 플랜테이션 가문의 후손인 빌 드레이턴(Bill Drayton)은 공간 기반의 윤리를 변화를 이끄는 협력의 초석으로 삼는 진보적인 사회적 기업 단체 아소카(Ashoka)의 창립자다.
[17] Martinez, “A Disappearing Woman,” p. 21.
[18] Dewey, p. 349
[19] 같은 책, pp. 22-23.
[20] Ingrid Commandeur, “Kimsooja: Black Holes, Meditative Vanishings and Nature as a Mirror of the Universe,” in Kimsooja: To Breathe (Seoul: Kukje Gallery, 2012), p. 9.
[21] 다음을 참조하자. Gonzalo Obelleiro, “Imaginative Empathy in Daisaku Ikeda’s Philosophy of Soka Education,” conference paper, Soka Education: Leadership for Sustainable Development, Soka University of America, February 11–12, 2006, www.sokaeducation.org/images/4/48/Imaginative_Empathy-Obelleiro.pdf, pp. 39–51.
오베예이로는, 불교적 전통과 비슷하게, 공감은 그저 누군가의 괴로움을 다시 경험하는 행위가 아니며 “우리는 그 사람이 경험하는 정서의 본질에 동참할 때 공감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필자가 보기에 듀이의 경험 철학은 이를 뒷받침한다. 듀이의 경험 철학은 “자아와 환경의 일원성과 몸과 마음의 일원성이라는 인식론적 기본 전제를 불교와 공유”하는 데다 “분명하게 인본주의적인 접근 방법을 통해, 인간적 상호작용을 특권화하며, 윤리를 규칙과 금언의 특정한 틀 안에 고정된 것으로 보지 않고 일차적 경험과 비판적 성찰 사이의 창조적이고 내적인 대화의 기술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오베예이로에 따르면 “듀이는 상상적 공감 같은 개념이 단순히 이론적 개념이 아닌 실천적 방식 또는 철학의 예술적 발현임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상상적 공감을 오로지 경험 안에서, 특히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안에서 배울 수 있다.” 그리하여 오베예이로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직접적인 경험, 그리고 정신과 영혼의 함양, 이 둘의 창조적 통합을 통해서만이 상상적 공감에 이를 수 있다. 이 통합을 위해 필요한 예술적 능력은 오로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것이 전형적인 인간의 성질(quality)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것을 지혜라고 부른다.”
[22] 듀이는 이렇게 썼다. “예술 작품에서는 불만족으로 인한 최초의 동요 그리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최초의 암시가 언제나 발견된다.” Dewey, Art As Experience, p. 360.
[23] Kimsooja, Buddha Mind in Contemporary Art, p. 217.
[24] 같은 책.
[25] Doris von Drathen, “Standing at the Zero Point,” in A Mirror Woman: The Sun & the Moon (Tokyo, Shiseido Gallery, 2008).
[26] 앞서 서술했듯이, 듀이는 경험은 “온전히 이루어졌을 때 참여와 소통의 상호작용으로 탈바꿈한다”고, 또한 “예술 작품은 수단이고 우리는 이 수단이 끌어낸 상상과 정서를 통해 우리 자신이 평소에 경험하는 관계와 참여와는 다른 형식의 관계와 참여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했다. Dewey, Art As Experience, p. 22, 347.
[27] 여기서 나는 물론 기 드보르(Guy Debord)의 1967년 저작 La Societe du spectacle(스펙터클 사회)을 참조하고 있다.
[28] 로버트 M. 피어시그(Robert M. Pirsig)는 그의 고전적 저작 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에서 참여하는(involved) 것과 구경꾼(spectator)이 되는 것을 구별한다. 피어시그에 따르면, 마음 씀(care)은 작품이나 행동을 예술로 만드는 것이다. Robert M. Pirsig 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 (New York: Harper and Collins, 1974), pp. 34-35.
[29] Dewey, Art As Experience, p. 348.


— 개인전 도록 수록 글. 『김수자 – 펼침』하체 칸츠 출판사 발행, 밴쿠버 미술관 협력, 밴쿠버, 캐나다, 2013, pp.145-155. 영한번역: 홍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