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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자: 레스 이즈 모어(Less is More)

올리바 마리아 루비오

2006

  • 김수자(1957년 대구 출생)는 오랫동안 진지하게 작가 인생을 이어오며 설치, 퍼포먼스, 사진, 비디오, 장소특정적 프로젝트 등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관을 발전시키는 데 전념해왔다. 확연하게 드러나는 그의 특이성에 동양의 특정한 철학이나 예술 전통을 연관 지으려 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가 다루는 핵심 소재는 현실 자체이다. 그의 작업을 특징짓는 개념은 그가 삶과 예술, 개인으로서 존재와 우리와 타인의 관계, 비어 있음과 존재의 덧없음에 관해 던진 질문에서 비롯된다. 그의 성장 과정과 살아온 경험은 기독교와 서구 철학이 선불교, 유교, 샤머니즘, 도교와 긴밀히 얽혀 독특하게 융합하는 사유가 형성된 배경이 되었다. 서양 미술사에서 그의 작업과 비견할 대상을 퍼포먼스와 신체예술 쪽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울라이, 발리 엑스포트 등이 김수자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동양이든 서양이든 어떤 이론이나 철학에 휩쓸리는 대신에, 자기 삶의 이야기와 기억과 감수성에서 출발해 사회적, 정치적 현실을 파고드는 궤적을 밟아왔다. 김수자의 작업은 보편성에 깊이 뿌리를 두었고, 인간 경험의 총체성을 포착하려 한다. 그의 작품은 마음과 신체와 영혼 모두에 주목한다.

  • 바느질한 오브제를 드로잉과 회화에 결합하는 추상 콜라주 작업을 해오던 김수자는 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연역적 오브제(Deductive Objects)>라는 이름의 설치작품과 공간 오브제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오브제를 감는 행위는 그 자체로 은유적 바느질 행위였다. 그리고 바늘, 천, 실, 조각보 등이 그의 창조적 우주를 이루는 일부가 되었다. 꿰매기, 감싸기, 접기, 펼치기, 덮기는 그가 거듭 되돌아가는 행위이다. 그가 택한 재료와 방법은 한국에서 천을 다루는 전통 방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1993년 김수자는 뉴욕에서 열린 두 개의 전시에서 보따리를 처음 등장시켰다. 레지던시 프로그램 참여로 1년 앞서 도착해 머물렀던 PS.1에서 열린 전시와, ISE 재단에서 열린 전시였다. 보따리는 천이나 옷가지 등을 낡은 한국식 전통 이불보로 감싸 묶은 꾸러미이다. 작가의 설명대로, 누군가 쓰던 이불보에는 "냄새, 기억, 욕망까지도 담겨 있어, 사용했던 사람의 정신과 삶이 묻어 있다." 그때부터 한국 문화에서는 이 평범한 물건, 보따리는 김수자의 작업에서 상수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한국에서 보따리는 이동(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과 연관되는데, 옷이나 책, 음식, 선물 등 깨질 염려가 없는 가재도구를 나르는 데 쓰이기 때문이다. 김수자는 가능한 온갖 조합으로 보따리를 선보였다. 보따리만 개별적으로 보여주거나, 바닥에 펼친 이불보와 나란히 놓기도 하고, 풍경을 배경으로 두어 물건 운반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기시키며 유목민적 가치를 상징하는가 하면, 비디오 설치와 병치하기도 한다.

  • 2000년과 2001년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비디오 연작을 제작한 그는 <보따리>를 반복하여 제목으로 삼았다. 그중 하나인 <보따리 – 조칼로(Bottari–Zócalo)>는 멕시코시티의 조칼로 광장을 가득 메운 거대한 인파—사람들 역시 색색의 작은 보따리와 같다—를 비디오 보따리로 보여준다. 또 다른 작품 <보따리 – 알파 해변(Bottari – Alfa Beach)>은 나이지리아의 옛 노예무역항에서 찍은 작품으로, 위아래로 이분할된 화면에 바다와 하늘이 뒤집혀 있다. 쉼 없이 앞뒤로 파도가 드나드는 녹회색 빛 바다에 이따금 파도가 부서지며 하얀 포말이 인다. 이 바다의 움직임은 바로 아래 화면 속 뭉게구름이 뜬 고요한 하늘과 대조를 이룬다. 작품은 눈앞에 드리운 알 수 없는 미래에 노예들이 느꼈을 불확실성을 전한다. <보따리 – 눈 그리기( Bottari – Drawing the Snow)> 에서는 백색의 스크린 위로 검은 눈송이가 흩날리며 떨어지는데, 무리 짓던 새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날아가는 듯하다. <보따리 – 일출을 기다리며(Bottari – Waiting for the Sunrise)>는 멕시코의 레알 데 카토르세에서 촬영한 작품으로, 고정된 카메라가 지평선까지 이어지는 자갈길을 바라보고 있다. 낡이 밝아오지만, 아직 해를 볼 수는 없다. 화면에 아무 움직임 없이 5분 가까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시간의 느릿한 움직임을 느끼며 풍경을 분간하려 애쓴다. 그러다 저 멀리서 하얀 불빛이 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챈다. 빛이 길 한가운데 자리하는 순간, 마치 시간과 공간이 결합한 듯하다. 하지만 불빛이 우리 정면으로 향하기도 전에, 비디오는 끝이 난다.

  • 다른 네 편의 작품과 함께 2006년 1월 베니스의 베빌라쿠아 라 마사 재단에서 열린 전시에서 처음 공개된 이 세 편의 비디오는 김수자의 최근작들을 예견하는 전조와 같았다. 이 작품들은 소리가 없는 작품이다. 마치 우리가 공간 자체에, 화면에 집중하기를 바라기라도 하듯, 작가는 시각에 유독 중요성을 부여한다. 나머지는 모두 관객의 상상에 맡겨져 있다. 그의 비디오 작업에는 움직임, 여행, 이행, 방향상실, 불확실성, 희망 등 우리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들에 대한 감각이 항상 깃들어 있고, 그래서 이 세 작품은 김수자의 이전과 이후의 작업 모두와 연결된다. 김수자는 유사성과 은유가 특별한 타당성을 얻는 삶의 여러 측면을 고찰한다.

  • 보따리 외에도, 김수자의 작업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요소는 누군가 오래 쓴 색색의 한국 전통 이불보이다. 그에게 이불보는 성, 사랑, 몸, 휴식, 잠, 사생활, 다산, 장수, 건강을 상징하는데,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 삶에 늘상 존재하는 의미 깊은 요소들이다. 보따리와 비슷하게 이불보도 여러 작품에 다양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바느질하며 걷기(Sewing into Walking)>(1995)에서는 바닥에 펼쳐져 있고, <연역적 오브제>(1996)에서는 보따리와 짝을 이루었으며, <만남 – 바라보며 바느질하기(Encounter – Looking into Sewing)>(1998-2002)라는 제목의 사진에서는 마네킹을 이불보로 덮어, 정체성의 상실과 타자와의 관계를 이야기했으며, <빨래하는 여인(A Laundry Woman)>(2000)과 <거울여인(A Mirror Woman)>(2002) 같은 작품에서는 빨래터를 연상하는 설치 작업을 하였는데, 이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또 다른 메타포이다. 이 두 작품은 리옹 현대미술관과 뉴욕 피터 블룸 갤러리를 포함해 여러 곳에서 전시된 바 있다.

  • 90년대 중반부터, 김수자는 기본적으로 일상을 기록하고 녹화하는 과정 속에서 본인의 몸을 매개로 한 개념적 퍼포먼스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1997년부터 2001년 사이, 그는 세계 곳곳의 여러 도시와 장소에서 행한 퍼포먼스를 담은 비디오 연작을 제작했다. 그러한 과정과 결과물 모두 우리와 타자의 자아 사이에 내재한 긴장을 화해시키려 한 그의 시도와 연관이 있다. 첫 번째 비디오의 제목은 <바느질하며 걷기– 경주(Sewing Into Walking – Kyungju)>(1994)이다. 이후 <떠도는 도시들 – 2727km 보따리 트럭(Cities on the Move – 2727km Bottari Truck)>은 1997년 11월 제작된 작품으로, 색색의 보따리들을 실은 트럭을 타고 한국을 떠도는 11일 간의 여정을 담았다. 7분 3초 분량의 영상은 시공간의 여정을 기록한다. 끊임없이 경계를 넘는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은유이자 현대 미술가와 우리 사회 전반의 한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한다. 노마디즘은 김수자의 예술에서 주축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로, 보따리를 상징으로 삼은 설치나 다른 비디오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이 비디오 연작의 공통분모는 여성의 형상으로, 카메라를 등진 채 미동도 하지 않는 여인, 즉 김수자가 등장한다. 이 여인은 수많은 배경 속에 등장한다. <바늘여인(A Needle Woman)>(1999-2001)에서는 도쿄, 상하이, 뉴델리, 뉴욕, 멕시코, 카이로, 라고스, 런던의 행인들 사이에 서 있거나 일본 기타큐슈의 바위에 누워 있다. <구걸하는 여인(A Beggar Woman)>(2000-2001)에서는 카이로, 멕시코, 라고스의 인도에 앉아 동냥을 하고, <집 없는 여인(A Homeless Woman)>(2001)에서는 뉴델리와 카이로의 길거리에 누워 있으며, <빨래하는 여인( A Laundry Woman)>(2000)에서는 뉴델리의 강가에 선 모습이다. 하지만 그곳이 어디든 작가의 형상은 언제나 다가갈 수 없는 존재로, 관객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군중에게는 허락된 것이 관객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우리 자신에 관해 스스로 불편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그 여인은 추상이 된다. 야무나강 앞에 서서 부동하는 여인의 이미지는 강물과 합쳐져 물결에 떠내려가는 잔해와 함께 멀리 흘러가버린다. 이들 작품에서 부동성은 모든 것을 감싼다. 하지만 작가는 단호히 화면 중앙에 자기를 세우면서도, 그로부터 자신을 거리두기 하는 데 성공한다. 작품 속 단출하면서도 묘하게 기운찬 작가의 모습은 일종의 자기확언이다. 김수자는 한편으로 자기 자신이자 동시에 '타인'이 되며, 존재하면서 동시에 부재하는 일을 해낸다. 그는 우리가 던지는 시선의 주체이자 객체이며, 개인이자 추상이고, 특정 여성이자 모든 여성이며, 도구이자 배우이며, 부동하면서도 단호하다. 이처럼 매끄럽게 이어지는 이원성은 2001년 쿤스트할레 베른에서 열린 《김수자, 바늘여인(Kimsooja, A Needle Woman)》전시 도록에 수록된 「자명하지만 문제를 제기하는(Obvious but Problematic)」이라는 글에서 베르나르 피비셰가 설명했던 것이다.

  • 작가가 선 분주한 거리의 풍경에도 소리가 없기에, 작품 감상은 순수 시각의 차원으로 환원된다. 누가 저 여인을 촬영하는 것인지, 여인은 어떤 사람인지, 군중을 마주한 여인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거리를 지나는 거대 도시의 주민들은 뜻하지 않게 배우가 된다. <바늘여인> 비디오에서 작가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길거리 한복판에 가만히 서 있다. 그의 절대적 부동성은 대도시의 떠들썩함과 대비되고, 우리 귀에 들리지는 않아도 분명 존재할 소음과도 대조를 이룬다. 카메라는 도시의 거리에서 발걸음을 옮기는 군중을 화면에 담는다. 카메라는 익명의 군중 얼굴은 보여주지만, 작가의 얼굴은 숨긴다. 행인 수천 명이 여인을 향해 걸어와 카메라의 시야에 들어섰다 사라진다. 카메라는 마치 사회학자처럼 '타자'를 대면한 군중의 반응을 기록한다. 런던, 뉴욕, 멕시코 사람들은 대부분 여인을 지나며 못 본 체한다. 상하이, 뉴델리, 카이로에서 여인은 좀 더 큰 관심을 일으킨다. 어떤 이들은 뒤돌아보거나 잠시 멈춰 그를 바라보기까지 한다. 하지만 가장 큰 호기심을 자아낸 곳은 라고스로, 비디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과 감정과 반응을 보여준다... 하지만 도쿄의 경우 익명의 군중에 드러난 감정의 요소라고는 어느 여성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가 유일하다. <집 없는 여성>에서는 카이로 사람들이 가장 큰 관심을 보인다. 일군의 남성들이 못 이기고 여인에게 접근해 가까이 다가와서는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본다.

  • 2005년에 열린 제51회 베니스 비엔날레를 위해 김수자는 파탄(네팔), 하바나, 리우데자네이루, 은자메나(차드), 사나(예멘), 예루살렘 등 도시 여섯 곳을 더 방문해 <바늘 여인>의 슬로우 모드로 된 새 판본을 만들었다. 연속된 여섯 개의 스크린이 하나의 비디오 설치로서 절대적 침묵 속에 전시된 가운데, 우리는 와글대는 행인들 소리와 멀리 도로의 소음을 그저 직관으로 느낄 뿐이다. 다시 한 번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이 빚은 그 형언할 수 없는 인물을 두고 사람들이 보이는 다양한 반응을 마주하게 한다. 새롭게 추가된 비디오 중 사람들이 작가의 존재에 가장 궁금해하는 곳은 리우데자네이루이다. 예루살렘에서는 몇몇 사람만이 호기심 있게 바라보지만, 경찰관 한 명이 미소를 지으며 작가에게 다가와 쳐다보고는 구경꾼들을 손짓으로 물려 보내고 그를 혼자 있게 해준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아 행인들은 작가보다는 그의 오른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일에 이목이 더 쏠린 듯한데, 그들의 시선이 그쪽에 멈춰 있다. 파탄에서는 화면을 가로질러 날아가는 새 떼와 주민들의 차분한 평온함이 대조를 이룬다. 파탄에서 움직임 없는 작가의 형상에 이끌린 이들은 주로 아이들이다. 하바나에선 한 남자가 그를 보고 얼굴을 찌푸리는데, 다수는 미소를 짓고 일부는 걸어가다 무어라 말을 한다. 사나에서는 남자들, 특히 젊은 남자들(거리에서 여성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있더라도 검은 장옷에 눈 부분만 트인 스카프로 온몸을 가리고 있다)이 그를 둘러싸고는 유심히 쳐다본다. 은자메나에서, 작가의 형상은 사람들의 각양각색 옷이 빚어낸 색의 매스와 군중이 움직이며 자아낸 리드미컬한 일렁임 속에 녹아든다. 머리에 짐이나 통을 지고 지나던 사람들은 작가를 둘러싸고 발걸음을 멈추어 가만히 보다 손짓으로 인사를 건네고 말을 걸기도 하는데 무어라 질문을 던지는 듯 하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호기심이 분명히 보인다.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는 단순 관찰자일 뿐인 우리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작가의 존재에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쩔 수 없이 약간은 긴장하게 된다. 언제라도 갑자기 폭력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불시의 일이 일어날까 두려운 마음이다. 하지만 전개되는 상황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을 향한 시선과 미소와 이런저런 말에 과연 작가 본인은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궁금해진다. 놀란 행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도 궁금하다. 뜻밖에 나타난 작가의 존재에 입 밖으로 나왔을, 하지만 막상 우리가 들을 수는 없고 추측할 뿐인 그들의 말이 궁금하다. 우리는 더 알고 싶다. 사람들 사이에 함께 서서, 우리 나름의 결론도 내려보고, 사람들 의견은 어떤가 파악하고, 과연 뜻밖에 마주친 저 부동의 여인에게 사람들 마음이 끌린 건지 아니면 불안하거나 당황스러운지 알고 싶다. 물론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할 수는 있다. 사람들이 카메라의 시야로 걸어들어와 무심코 주인공이 될 때 카메라가 얼굴을 보여주기 때문으로, 대체로 존중하는 반응이다. 하지만 동시에 본능적으로 우리는 행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듣고 싶어 한다. 작가는 자신을 드러내고 또 우리를 드러낸다. 작가를 관찰하는 우리 역시 군중에 열린 존재가 되어, 사람들의 반응을 새기며 작가와 함께 군중과 하나로 합쳐든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더 알고 싶다. 그들이 드러내는 개별성의 작은 단서를, 이 세상에 존재하며 그들이 발하는 작은 불꽃을 말이다.

  • 사람들이 보이는 행동과 그들이 작가와 마주치며 보이는 표정과 반응을 통해, 김수자는 다른 나라에서 다른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상황 속에 살아가는지 우리의 이해가 얼마나 제한적인지를 체험하게 한다. 작가는 나라마다 사람마다 그 사이에 놓인 최소한의 차이를 탐구해, 무엇이 어느 하나를 나머지와 구별 짓는지를 짚어내려 한다. 그는 무작위로 퍼포먼스를 진행할 도시와 국가를 고른 것이 아니다. 김수자의 선택은 포스트식민주의, 내전, 국경 분쟁, 극심한 빈곤으로 촉발된 해당 지역의 갈등을 그가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김수자는 지치고 노쇠한 유럽과는 전혀 다른 곳, 그토록 갈등에 시달리며 알 수 없는 상황과 날카롭게 맞서는 곳에서 슬픔을 발견하고 영감을 얻는 듯하다.

  • 이 모든 비디오에서 김수자는 반복되는 상황과 변치 않는 자신의 이미지를 연속하여 제시함으로써 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다. 사람들의 신체적, 물리적 존재는 자연과 마찬가지로 그의 작업 속에 침투한다. 사람들은 세상에 다양한 존재 방식이 존재하고 우리가 고독한 존재임을 표명하는 동시에, 세계란 언제나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는 타인에 둘러싸여 살아간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김수자의 작업을 두고 젠더 문제로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시각이 있지만, 그의 작업은 젠더 문제를 훨씬 넘어선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혼돈의 세계 속에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를, 그 모든 고독과 덧없음까지 함께 보여준다.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인간이 남긴 흔적, 즉 사람들의 '발자국'을 통해 인류는 김수자의 작업에 언제나 존재한다.

  • 정치적 문제에 직접 맞서는 것이 그의 관심사는 아니지만, 인간이 처한 상황과 현실을 향한 그의 시선은 종종 정치적, 사회적 사건과 분명 연관된 설치 작업으로 이어졌다. 때로는 사건에 대한 반응이고, 때로는 그에 관한 기억의 구성이며, 희생자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제1회 광주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바느질하며 걷기(Sewing into Walking)>(1995)는 공원의 땅바닥에 흩어 놓은 헌 옷가지와 보따리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전장에 널브러진 시신 같다. 이 작품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수백 명의 광주 학살 희생자에게 헌정되었다. 일본 나고야 시립미술관에서 선보인 <연역적 오브제 – 내 이웃에 바침(Deductive Object – Dedicated to my Neighbors)>(1996)에서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옷가지들이 섞여 있다. 같은 해 작가의 동네에서 벌어진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에게 바치는 의미를 담은 작품이다. 제48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시한 <모든 것에 열린, 혹은 망명의 보따리 트럭(D'APERTutto or Bottari Truck in Exile)>(1999)은 색색의 보따리를 가득 실은 트럭 앞에 거울을 설치하여 트럭의 거울상을 보여준다. 거울이 끊임없이 공간의 열림을 창출하지만, 거울은 제 앞에 열린 트럭의 길을 스스로 막고 있다. 코소보 내전 난민에게 헌정된 이 작품은 당시 베니스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강제 이주, 죽음, 파괴 등 전쟁의 참상을 상기시켰다. <묘비명(Epitaph)>(2002)은 2001년 9월 11일에 일어난 사건에 응답하여 선보인 작품이다.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이 강렬한 사진 속에서 작가는 브루클린 그린론 공동묘지 땅 위에 색색의 이불보를 펼쳐 놓는다. 살아있는 자의 비석과도 같은 맨해튼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쌍둥이 빌딩이 사라지고 남긴 거대한 빈자리가 보인다.

  • 작가로서 활동한 내내, 특히 최근 몇 년 사이 김수자는 설치, 사진, 퍼포먼스, 비디오 작업과 더불어 장소특정적 프로젝트에 참여해왔다. 천, 특히나 눈길을 사로잡는 한국의 이불보, 빛과 색의 시퀀스, 티베트 · 그레고리오 · 이슬람 수도자들의 성가, 작가 본인의 숨소리 등이 작업의 주요 수단으로, 그의 작업임을 알리는 특징이 되었다. <심겨진 이름들(Planted Names)>과 <등대여인(A Lighthouse Woman)>(2002)이 그러한 사례로, 노스캐롤라이나 찰스턴에서 열린 스폴레토 페스티벌 USA 2002의 일환으로 설치되었다. 김수자는 찰스턴이라는 식민지 수도의 세계도시적 성격과 도시의 해양 유산을 일깨우는 《물의 기억》전시에 참여했다. <심겨진 이름들>은 드레이튼 홀 농장에서 일했던 노예들을 기리는 한편, 군인 장교의 딸로 비무장지대에서 자라 이후 가족과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이주하며 성장해온 작가 본인의 이야기를 반영한다. 네 장의 검은 카펫 위로 드레이튼 홀 농장에서 노예해방 때까지 일했던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이름이 흰 글자로 두드러지게 적혀 있다 . 드레이튼 홀 1층의 대형 홀 주변의 방마다 설치된 카펫은 공간을 변화시켰다. 작품이 설치된 드레이튼 홀은 미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농장 저택으로, 조지안 팔라디안 건축 양식의 보물로 여겨지며 보존 중인 건축물이다. 과거의 묵상으로서 카펫은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의 기억이 특히 울림을 주는 공간에 전략적으로 배치되었다. <등대 여인>에서 작가는 빛과 색과 바다소리를 사용해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의 모리스 섬에 버려진 등대를 기념비로 변모시킨다. 모리스 섬에서 벌어진 남북전쟁의 희생자를 기리는 이 작품은 등대 자체가 상징하는 빛과 물의 영원한 관계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하다.

  • 비엔나 쿤스트할레에서 전시된 <빨래하는 여인(A Laundry Woman)>(2002)은 다채로운 이불보와 티베트 승려들의 독경 소리로 구성되어 있다. 거대한 창문을 통해 쿤스트할레 바깥에서 이불보를 볼 수 있는데, 마치 빨랫줄에 빨래를 널듯이 설치되어 있다. 이불보는 여성의 역할을 나타내는 은유로 기능하며, 쿤스트할레의 내부 공간과 바깥의 도시 풍경, 더 나아가 삶과 예술, 내밀함과 보편성 간의 대화를 형성한다.

  • 제2회 발렌시아 비엔날레 측은 김수자에게 도시 안의 빈 부지를 활용한 설치 작업을 청했다. 그렇게 탄생한 <솔라레스코프(Solarescope)>는 건물에 다변하는 오방색의 빛 시퀀스를 영사한 작품으로, 버려진 부지에 생명력을 선사했다. 프랑스 릴의 라모 팔라스에 설치한 <로투스 – 0의 지점(Lotus: Zone of Zero)>(2003)은 307개의 연등과 음악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붉은 연등이 연꽃 모양으로 배열되어 건물의 원형 홀에 매달려 있다. 그리고 공간 속으로 티베트, 그레고리오, 이슬람 성가 소리가 흘러 넘친다. 눈길을 사로잡는 설치의 아름다움을 넘어, 인간 존재 사이에 평화와 사랑과 이해를 촉구하는 작품이다.

  • <거울여인 – 어디에도 없는 땅(A Mirror Woman: the ground of nowhere)>(2003)은 하와이 호놀룰루 시청 내의 메인홀에 설치한 작품으로,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을 기념해 열린 「크로싱 2003: 한국/ 하와이(Crossings 2003: Korea / Hawaii)」 의 일환으로 선보였다. 고운 거즈 천으로 된 커튼이 지면에서 18m 위에 걸려 있는데, 아래에서 말려 올라가 직경 6m에 달하는 거대한 원통 관 형태를 이룬다. 바닥에 깔린 거울 위로 하늘이 반사된다. 그 거울/바닥 위를 거닐거나 누우면, 관객 눈에는 오로지 흰 구름이 뜬 짙푸른 하늘과 자신의 거울상만이 보일 뿐이다. 이 작품은 한국인 이민자들이 미국에 도착하며 느꼈을 희망, 설렘, 향수의 분위기를, 또한 100년 전 하와이섬에 첫 발을 디딘 1세대 이민자들을 압도했을 상실의 감각을 포착하려 한다.

  • 2004년 뉴욕 더 프로젝트의 전시실 한 곳이 4채널 사운드의 티베트, 이슬람, 그레고리오 성가 소리로 가득 찼다. 김수자가 이곳을 위해 구상한 <만다라 – 0의 지점(Mandala: Zone of Zero)> (2004)이다. 고립, 묵상, 몽상의 공간을 창조한 그는 전시실의 네 개 벽마다 화려한 주크박스 스피커를 배치했다. 불교 만다라와의 형태적 유사성을 활용한 것으로, 서양의 대중문화적 사물에 동양 종교의 함의를 불어넣는다. 주크박스에서 흘러나온 성가 소리들이 하나로 뒤섞여 관객을 소리의 빔으로 에워싼다. 작품은 서로 다른 문화와 사회적 맥락과 미학의 동화를 표현하며, 마음과 몸이 영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개념에 따라 통합성과 총체성을 탐구한다.

  • <등대여인>과 <솔라레스코프> 같은 장소 특정적 프로젝트에서 이미 선보인 빛과 색상의 실험을 이어가며, 2003년 김수자는 빛과 색의 시퀀스를 실험하는 비디오들을 제작하여, 빛과 색이 지닌 아름다움과 에너지를 활용해 주파수와 리듬을 탐구했다. <보이지 않는 거울(Invisible Mirror)>, <보이지 않는 바늘(Invisible Needle)>, <바람의 여인>이 이 연작에 속한다. <보이지 않는 거울>에서 색은 스펙트럼 전체를 소화할 때까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서서히 색의 범위와 강도를 변화시킨다. <보이지 않는 바늘>에서는 시퀀싱 속도가 점점 증가해 스크린을 가로지르는 색조를 맨눈으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정신없이 진행된다. 세 번째 <바람 여인>은 자연을 다룬 작품으로, 미국의 헨리 아트 갤러리에서 처음 선보였고, 이후 유럽에서는 베니스의 베빌라쿠아 라 마사 재단에서 처음으로 전시되었다. 김수자는 카메라로 자연을 고속 촬영하여, 게르하르트 리히터 스타일의 추상 비디오를 만들어냈다. 세 작품 모두 무성으로, 사운드는 유일하게 우리 상상 속에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거울>과 <보이지 않는 바늘>은 한 편의 비디오 설치로 합쳐졌고, 여기에 2004년 작가의 숨소리로 만든 <직물 공장>[JL5] 의 사운드를 입혔다. 세 작품의 결합체인 <호흡 – 보이지 않는 거울/ 보이지 않는 바늘(To Breathe : Invisible Mirror / Invisible Needle)>[JL6] 이 2006년 1월 27일 베니스의 라 페니체 극장에서 첫선을 보였고, 2월과 3월에는 당시 극장에 상연되던 에르마노 볼프-페라리의 오페라 「네 명의 시골뜨기」와 바그너의 「발퀴레」 공연에 앞서 영사되었다. 관객이 마주한 대형 스크린 위로 색상 스펙트럼의 색들이 서서히 변환된다. 관객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느릿한 숨소리에 놀라지만, 극장에 들어설 때는 소리의 출처가 어디인지 알아차리기 힘들다. 서로 다른 강도의 색이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데, 마치 극장에서 반사된 색을 거울처럼 그대로 비추는 듯하다. 한편 호흡은 점점 강렬하고 깊어져, 공간 전체에 팽배한 느낌이다. 작품 전반부에서 작가의 호흡 리듬은 점차 빨라지고 깊어져 진정한 고통의 순간에 다다른다. 후반부로 가면 호흡의 음조, 조절, 리듬이 바뀌어가며 조화로운 절정에 이르러, 하나의 찬가, 기도, 합창, 관악기 소리처럼 변모한다. 관객은 이러한 경험 속에 밀려 든다. 스스로 작품의 일부가 된 느낌으로, 들숨과 날숨이 빚는 카덴차와 속도를 뒤쫓는다. 우리는 작가의 호흡에 나의 불안감이나 안도감을 싣는다. 호흡이 삶의 은유인 것처럼, 불확실함에서 평온함으로, 고뇌에서 휴식으로, 심각한 위험에서 진정한 즐거움으로 무척이나 다양한 감정 상태를 오가게 된다. 우리는 건강과 질병, 혼돈과 조화를 느낀다. 호흡이 우리를 너무도 깊이 흡인해 그 숨이 몸속으로 들어오는 것만 같다. 이 작품은 자체로 대비를 통해 작용한다. 하지만 라 페니체에 놓임으로써, 호흡의 단순성과 색에서 발산된 빛의 순수성이 조화롭게 공간을 감싸며 바로크 양식의 리릭(lyric) 오페라 극장과도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 단순한 요소들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며, 김수자는 최대한의 효과와 감각과 감정을 성취하고 풍부한 발상과 개념을 던진다. 그의 예술은 감각과 상상에 모두 호소한다. 어마어마하게 아름답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의 경험에서 마주하는 개념과 상황에 던지는 불편한 질문에서 한눈팔게 만드는 일은 없다. 자신의 시대와 그 문제에 참여하는 예술가로서, 김수자의 작업은 내면으로 파고드는 동시에 세계에 말 없는 시선을 던져 세상을 끌어안는다.

  • 그의 작품은 침묵에 휩싸인 듯하다. 고립과 침잠을 향한 열망이 퍼포먼스를 담은 비디오, 천으로 만든 설치작품, 심지어 사운드가 포함된 비디오 설치에서도 스며 나온다. 그것은 주변 세계의 혼돈과 소음에서 잠시 벗어나, 우리 자신을 다시 마주하고 우리와 타인의 관계를 질문하며, 또한 이 세계 속 우리 자리에 관해 성찰하고 존재의 본질적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해 보자는 초대와도 같다. 전시 공간은 하나의 성소가 되었다.

  • 김수자의 <호흡 – 거울여인(To Breathe – A Mirror Woman)>은 마드리드의 크리스털 팰리스에 설치한 작품으로, 해당 공간에 대한 개입과 사운드 전작인 <직물 공장(The Weaving Factory)>(2004)이 작품을 이루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전작들과 논리적 연속선상에 있다. 김수자는 크리스털 팰리스의 구조를 활용하였는데, 공간의 본래 구조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바닥에 거울을 설치하여 하나의 전체를 이루게 하였다. 거울은 원 공간의 증식기이자 통합기 역할을 한다. 여기에서 김수자는 최소한의 요소, 즉 수정궁의 유리 돔과 벽을 감싼 투명 회절 필름, 바닥을 덮은 거울 그리고 자신의 숨소리를 활용하여 우리를 변모의 경험에 빠뜨린다. 우리는 마음과 감각을 실험하며 감각적 인식과 상상을 자유롭게 펼치게 된다.

  • 제목 자체는 거울과 호흡을 활용했던 기존 프로젝트 외에도, 바늘과 바느질 작업을 재참조한다. 작가 자신이 군중을 꿰뚫는 바늘이 된 <바늘 여인> 같은 비디오 설치에서 그러했듯, <거울 여인>에서 작가는 곧 거울이 되니 현실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창출하는 거울이다. 다가온 것을 되돌려보내는 표면처럼, 작가는 하나의 현실을 흡수해 다른 현실을 반사하여 또 다른 현실을 창조한다. 그는 반영자이자 또한 거울이 비춘 현실의 창조자이다.

  • 하나의 전체로서 <호흡 – 거울여인>은 우리를 다시 보따리로 이끈다. 보따리에서도 그는 싸고 감았다. 이 프로젝트에서 그는 크리스털 팰리스를 투명 필름으로 감쌌다. 하지만 보따리가 옷가지와 소지품을 싸서 멀리 옮기는 것이라면, 여기에서는 건물이 바로 우리를 감싸 신체와 상상과 감각의 경험을 통해 우리를 실어 나른다.

  • 외부의 빛이 파빌리온의 유리를 통과해 들어오면 투명 필름이 빛을 무지갯빛 스펙트럼으로 분산시킨다. 그래서 궁 안에서 보는 외부 모습을 변형할 뿐 아니라, 실내의 모습과 느낌도 달라지는데, 실내 전체 구조와 다채로운 빛줄기가 거울 바닥에 반사되고 또 반사된다. 밖에서 본 궁의 내부도 빛과 나무들이 비치며 모습을 달리한다. 이러한 효과는 특히 맑은 날 강력하게 발휘된다. 하지만 흐린 날이라 해도, 구름 낀 하늘이나 성난 하늘에 잠시 해가 고개를 내밀면, 햇살이 빛의 대비 수준을 높여 여러 개의 무지개를 만들어낸다. 비슷하게, 햇빛이 회절 격자 필름에 직사하면 빛의 스펙트럼이 궁의 실내 표면에 투영되는 효과가 추가로 빚어지는데, 거울이 이를 다시 방문객과 실내 전체에 반사하면, 마치 무지개 속으로 빨려들어 그 일부가 된 듯한, 무수한 무지개 중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무한히 재생산되는 빛의 스펙트럼은 낮 동안 변화하며, 직선, 일렁임, 후광, 지그재그 등 여러 형상을 낳는다. 이는 김수자가 자주 쓰던 색색의 전통 이불보나 <바람 여인>에서 자연으로 행한 작업을 연상시킨다. 특정 시간대가 되면 빛의 강도에 따라 유리 건물이 주변 정원의 나무들과 어우러져 한 점의 추상화가 된다.

  • 자연광, 색, 소리 같은 모든 무형의 요소가 손에 잡힐 듯 공간을 가득 채운다. 시선을 방해하는 어떤 사물도 없이, 그저 빛과 색뿐이다. <직물 공장> 퍼포먼스의 숨소리가 공간에 넘쳐들어, 거울을 통해 거듭 반향되고 반향되어 실내 전체로 확장하여, 결국 내부와 하나가 되고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공간 속에서 빛과 소리의 파동과 거울의 파동이 우리 몸과 함께 호흡하며 엮여든다. 나는 거울비춤이 또 다른 방식의 바느질이라고 생각한다."

  • 퍼포먼스 전반부에서 김수자의 숨소리는 느릿느릿 부드럽고 거의 들리지 않다가 점점 깊어지고 빨라져 참을 수 없는 속도에까지 다다라 고통에 찬 불안감을 자아낸다. 우리는 작가의 호흡 패턴을 통해 급변하는 감정 상태를 경험하며, 그러다 결국 그의 호흡과 우리의 호흡이 하나가 된다. 후반부에서 그의 숨소리는 배경음 정도로 들릴 뿐 거의 분별할 수가 없다. 호흡의 음조, 조절, 리듬이 변하였다. 혹시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인가 싶지만, 숨에 다른 음의 숨을 겹쳐가며 이 리듬감 있는 크레센도와 조화의 감각을 창조하는 것은 여전히 작가 본인의 호흡이다. 퍼포먼스의 전후반부 모두 들숨과 날숨은 코로만 이뤄진다. 호흡하는 동안 그는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 김수자는 코로 호흡만 하는 것이 아니라 허밍도 한다. 작가는 거울의 반사가 호흡과 같다고 여기는데, 두 작용의 구조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반사도 호흡도 안에서 밖, 밖에서 안이라는 지향성을 가지며, 그리하여 둘 다 하나의 현실을 끌어내 또 다른 현실을 창출한다.

  • 김수자는 몸의 최소 부위를 사용해 무수히 많은 소리를 만들어내는데, 회절 필름이 다채로운 광선을 낳는 것과도 비슷하다. 소리와 색이 덮쳐와 감정의 전 영역을 경험케 한다. 11분 38초간 오디오 퍼포먼스가 이어지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당혹감에서 기쁨으로, 불안에서 환희로, 반신반의에서 깨달음으로 치솟는다. 김수자는 내부로의 여행에 우리를 초대한다. 공간의 내부, 무지개의 내부, 거울의 내부, 호흡의 내부로 말이다.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우리 자신 속이다. 안을 향해 들어가는 이 여행에서 우리는 김수자의 작업에 언제나 존재하는 타자와 마주한다. 거울은 에고와 얼터에고를 연결하고, 우리가 항상 품고 있는 타자성을 비춘다. 거울은 끌어당기고 반사한다. 반사는 에고를 외화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김수자는 우리 몸과 공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는 예술을 우리의 몸과 마음, 감각적 지각, 상상력의 경험으로 만들어낸다.

— 『김수자: 호흡 – 거울여인』, 2006년 도록 수록 글,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이재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