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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소연 (삼성미술관 로댕갤러리 학예실장)
2010
문명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풍광들. 물과 불과 공기가 어우러진 화산의 지층들. 그들은 자연의 태초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수억 년의 세월을 견딘 노쇠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우리가 그 자연의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까닭은 그들이 정지한 풍경으로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처럼 유동하고 새롭게 생성하며 변화하는 모습을 이루어내기 때문이다. 감각으로 지각되는 세계, 그러면서도 그 너머의 신비의 세계와 맞닿아 있는 자연의 풍경에서 작가는 ‘흙, 물, 불, 공기: Earth-Water-Fire-Air’란 사원소의 의미를 되새긴다.
2000년 로댕갤러리 전시 이후 첫 귀국전으로 마련된 김수자의 이번 전시는 지난 10년 동안 그가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진행해온 여러 프로젝트들의 가장 근원적인 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흥미를 더한다. ‘보따리 작가’라는 별칭이 무색하게 이번 전시에서는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화려한 원색의 이불천도 군중들도 그리고 자아의 소실점이라 할 그 자신의 뒷모습도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에게 생경하기만 한 꿈틀대는 자연 풍경만이 제시될 뿐이다. 도시적 삶과 파편화된 자아들, 그들의 사회적 관계와 모순들에 전념하는 현대미술의 지평에서 원시의 자연에 주목하는 일, 더 나아가 그 자연의 구성 원소들을 상기시키겠다는 발상은 현대미술의 문맥에서 한참 동떨어진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동시대인의 삶의 양상에 주목하고 그에 대해 깊은 연민의 시선을 보내온 작가는 우리들 일상의 반대편에 놓인 자연의 구성 원소로써 우리의 삶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그가 처음 바느질을 경험한 사적인 순간과 자연의 흙, 물, 불, 바람의 원소는 이미 맞닿아 있었다고 해야 할 만큼 김수자의 작품세계는 삶으로부터 자연에 이르는 일관된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하던 김수자는 1983년 어느날 어머니와 함께 이불보를 꿰매던 일상 속에서 우연히 경험한 매우 특별한 순간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바늘이 천에 꽂히는 순간 바늘 끝을 통해 자신의 온 몸을 관통하던 어떤 에너지를 체감한 것이 바로 그것인데, 바늘과의 극적인 조우라 할 수 있는 이 경험을 계기로 캔버스의 평면에 대한 오랜 질문으로부터 세계의 깊이와 구조, 그 이면의 공허를 향해 나아가는 해답을 찾게 된다. 초기의 천과 바느질 작업이 수평의 평면에 물리적으로 관통하는 수직의 세계를 제시했다면<연역적 오브제(Deductive Object)>그가 걷거나<바느질하여 걷기(Sew
ing into Walking)> 세계 각도시의 군중 속에서 움직임 없이 서있는 작업<바늘 여인(A Needle Woman)>, 뒤돌아서서 자연과 마주한 작업<빨래하는 여인(A Laundry Woman)>에서는 상징적인 바느질 행위를 통해 현실과 그 이면을 시각적으로 꿰뚫어 보고자 했다. 스스로를 바늘로 상정하여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를 매개하는 행위를 하면서 작가는 스스로의 몸이 ‘소실점’이 된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 말은 천의 표면 뒤로 사라지는 바늘의 끝처럼 관계와 소통의 매개체로서 사람과 자연 속으로 사라지는 자아를, 관객으로 하여금 뒤돌아 선 작가의 몸을 통해 그 앞에 마주한 광경을 경험하게 하는 ‘타인의 아바타’로서의 자아 소멸을 의미한다. 자아의 소멸을 통한 타자와의 일체화는 바늘만큼이나 의미심장한 ‘거울’을 통해 더욱 본격화된다. 바늘이 관계성과 치유에 의미를 두면서 인간적 삶의 구조를 더 직접적인 다루었다면 거울은 ‘반영’이란 메커니즘을 통해 인간적 삶으로부터 그에 상반된 요소인 자연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마련한다. 김수자가 거울을 최초로 사용한 것은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시장의 막다른 벽면에 다다른 보따리 트럭 앞에 전면 거울을 설치함으로써 트럭이 전진할 가상의 도로를 확장하고 후면의 아르세날레 공간 전체를 감싸 안는 시도를 한 작품에서다. 이후 2002년부터 <거울 여인 (A Mirror Woman)> 시리즈를 전개하면서 그는 모든 사물을 비출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은 비출 수 없는 비존재(Non-Being)의 오브제인 거울을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다. 작품으로부터 자신의 수행적 이미지를 제거한 것은 바로 그 이유에서이며 대신 작품의 내부에 관객이 휴식하고 명상할 수 있는 장소특정적 건축 공간을 구성하게 된다. 또한 바늘이나 보따리에서 다루었던 이중성의 화합은 상반된 것을 드러내는 상징적 거울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사유된다. 거기에는 자아와 타자, 남성과 여성, 감싸기와 펼침의 세계는 물론 실재와 가상, 정신과 물질, 해와 달, 양과음, 들숨과 날숨과 같이 자연의 원리에 근접하는 요소들이 적극적으로 다루어진다. 예를 들어 <거울 여인> 시리즈 중에서 가장 최근의 영상작업인 <해와 달>(2008)에서 김수자는 바다 수면 위에 드리워진 햇빛과 달빛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이클립스로 인한 그 둘의 중첩현상을 다루면서 개념적으로 불가능한 양과 음의 합일을 시각화했다.
-세계 구석구석에서 만난 무수한 삶의 파노라마를 목도하면서도 그 너머의 세계를 지향해 온 김수자에게 자연이 피상적인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흙, 물, 불, 공기의 근원적 요소로 인식된 점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이 네 가지 요소는 그의 작품 전 영역을 관통하는 음과 양의 요소와 더불어 ‘세상 만물의 뿌리(Rhizome)’로서 인식된다. 물질로서의 자연의 4원소는 비록 계몽주의 이래 115개 원소의 일부로 파악될 뿐이지만, 사상적으로는 시공을 초월해서 동양의 오행사상(金水木火土)의 근간이 되는 것은 물론, 불교에서 말하는 만물이 생겨나는 다섯 가지 원소(地水火風空)의 핵심이자 서양의 철학적 전통으로서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우주를 네 가지 요소로 설명 하려 했던 기원전 6세기의 엠페도클레스(Empedocles)는자연의 사계절이나 인생의 네 단계(유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 동서남북의 4방위 개념과 더불어 물질계를 흙, 불, 불, 공기 사원소의 혼합체로 파악했다. 그에 따르면 이 세상에서 창조되거나 소멸하는 원소는 없으며 다만 네 가지 원소 상호 간의 조합과 교환의 결과물만이 존재하는데, 원소들을 결합하거나 분산하는 것이 사랑(philia)과 증오(neikos)의 힘이라는 것이다. 동양의 음양사상으로도 대체될 수 있는 이 에너지와 물질 간의 역학관계는 세계를 생성과 변화의 역동성으로 이끄는 ‘영원 회귀’의 원동력으로 파악되고(니체) 에로스와 타나토스처럼 인간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프로이트). 물질로서의 자연이 인간의 내면과 긴밀하게 다시 만나는 지점. 김수자가 자연 속에서 인간의 삶을 파악하고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감싸 안으려 시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스페인 카나리 군도의 란자로테 섬에 위치한 사화산과 과테말라 파카야 활화산을 촬영해 모두 7개의 독립된 영상으로 구성한 작품들은 대부분 우연의 산물로 포착되었다. 우연히 달리는 차 안에서, 길을 걷다가 걸음을 멈춘 사이 우연히 작가의 시야에 들어온 풍경들을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자연의 근원적인 모습을 프레임 안의 의도된 도상으로, 또는 만들어진 상징체로 포착하는 일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그것이 불가능한 미션일 때 작가는 프레임 밖의 세계를 향해 열려진 지표로서의 영상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때 우연히 얻은 영상들의 배열이야말로 순전히 작가의 몫으로서 지극히 창의적으로 이미지 너머의 원소들을 호명하고 작품 상호간의 배려깊은 연관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엠페도클레스가 말한 ‘우연의 필연성’이란 모순된 원리를 실현해낸다.
아뜰리에 에르메스의 공간구조상 독립된 방안에 전시된 첫 작품은 란자로테 섬의 화산지대를 어두운 밤중에 자동차로 달리면서 차창 밖 화산섬을 향해 플래쉬를 비춘 모습을 촬영한 것으로, 희미하고 둥근 손전등 빛 주위로 달무리처럼 풍경이 서린 광경을 보여준다. <공기의 불>이란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밤’풍경 속 보이지 않는 공간인 허공의 깊이를 가늠하면 서 창조의 근원으로서의 공기에 대해 사유한다. 문명 이전의 어둠과 텅 빈 공간에 대한 은유이면서 인간의 무의식과 상상계에 대한 언급인 이 작품은 다가올 불의 생성을 암시하기도한다. 반면 본 전시장에 들어가 마주하는 <불의 공기>는 거친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연무 위에 떠오르는 놀라운 무지개, 그리고 장엄한 파도소리로 말미암아 가장 관객을 압도하는 작품이다. 드라마틱한 자연의 용틀임에 속에서 보는 이의 피부에 포말이 와 닿을 듯 생생함을 전해주는 이 작품이 불에 관한 사유인 것은 하나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작가는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지개를 통해 텅 빈 무의식의 공간에서 태어난 불의 찬란한 욕망과 프로메테우스가 신들로부터 훔쳐온 문명의 기원에 대해, 그리고 상징계의 탄생에 대해 사유할 기회를 준다.
이어진 <흙의 불>과 <흙의 물>은 화산지대를 낮과 저녁시간에 자동차를 달리며 바라 본 풍경으로 첫 작품인 <공기의 불>과 더불어 빛이 풍경의 표면에 닿음으로써 변화하는 공간의 깊이를 탐구한 작품이다. 풍경의 평면에 맞닿은 빛의 바늘의 구조적인 공간 탐색이라고나 할까. 이들이 변모하는 인상을 갖는 것은 모두 부동의 대지를 대상으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빛과 속도라는 유동적인 요소와 만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흙의 공기>는 활화산의 불길이 화면 전체를 가득 채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에 대한 언급이 아니라 여전히 흙에 대한 사유로서 제시된다. 작가와 스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불구덩이의 이삼백 미터 근방까지 접근해서 촬영한 이 작품에서 정작 주목되는 것은 이글거리는 불이 아니라 돌덩이들이 타오르는 생명을 소진하다 남기는 재다. 에트나 화산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 현자(賢者)는 자연이 열반에 드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고자 했을까. 만물은 흙으로 회귀하고 그런 흙은 노년과 겨울, 그리고 죽음의 실재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글거리는 활화산의 머리 위에는 맑고 푸른 하늘이 걸려있다. 역시 역설적이기만 한 <물의 공기>라는 제목을 가진 이 작품은 <흙의 공기>와는 불과 물, 땅과 하늘이라는 이중적인 대립항을 형성한다. 그것은 또 만지면 마치 단단한 저항감을 손바닥에 전해줄 것 같은 물결의 움직임을 포착한 <물의 흙>이라는 작품과 서로 비껴서 마주하고 있다. 모든 대립과 갈등을 치유하는 여신으로서 물은 공기의 공허함과 불의 야망, 흙의 비관을 모두 감싸 안으며 새로운 시작과 생명의 기원을 약속한다.
삶의 근원과 자연의 원소들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아니라 이면의 의미, 또는 원소들의 신비한 조합에 있다고 믿는 김수자의 작업은 마치 기표와 미끄러지는 기의의 퍼즐 맞추기처럼 완성이 불가능하다. 네 원소의 순열조합은 총 128개지만 그의 작업은 수학적 추론의 한계를 벗어나 우연과 돌연변이가 개입될 수 있는 자연의 순열조합으로서 바슐라르가 주장한 ‘물질의 상상력’까지 더해진다면 무궁무진한 ‘만달라의 만개(滿開)’를 기대할 수 있다. 김수자에게 작업의 완성이란 더이상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이 오기까지 어떤 빛의 방출과 어떤 생명의 진화가 전개될 지 흥미롭게 지켜볼 일이다.
— This article was published for a review of Kimsooja’s solo exhibition at Atelier Hermes in Seoul in Wolganmisul Magazine of Feb., 2010. Translated by Kate YK Lim (Arte en Fide Representati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