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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따리의 개념

아네트 레케르트

2001

  • 꽉 묶은 봇짐—객관적인 의미에서나 은유적인 의미에서나 '간직된' 어떤 것—은 바닥에 누워 있는 몸처럼 끌림과 호기심을 동시에 자극한다. 내용물을 감싼 천을 잡아주는 매듭을 손으로 쥐어보면 짐 꾸러미 안에 감추어진 것의 수수께끼, 즉 이 꾸러미와 그 기원에 관한 이야기가 드러날 듯하다. 그것은 아마도 통과의 이야기, 곧 출발과 여행 그리고 도착의 이야기일 것이다. 특히 이 짐 꾸러미는, 그것이 현실적 지칭이든 문학적 모티프든 상관없이, 거의 모든 사람의 의식 속에 깊이 닻을 내린 하나의 원형이다. 소설의 영웅이 단호히 각오를 다지며 '봇짐을 쌀' 때, 그것은 이야기의 흐름에서 극적인 전환점을 상징한다. 이처럼 겉보기에 단순한 짐이라는 형식은, 언제든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것으로서 열린 과정을 나타낸다. 그것은 다시 말해 다가올 것에 대한 복잡한 기대를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다른 삶-공간, 또는 삶-시간에서도 완벽히 기능할 수 있는, 삶의 응축물일 수 있다.

  • 김수자는 1992년 이래 점점 더 다양한 맥락과 배치 속에서 선보여 온, 활기차게 밝은 색감과 풍성한 무늬의 천으로 감싼 짐 꾸러미를 ‘보따리(bottari)’로 명명한다. 김수자의 고국인 한국에서 최근 일어난 격변과 활기찬 재도약에도 불구하고, 천으로 싼 보따리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가족의 세간살이를 안전하게 보존하거나 운반하기 위한 평범한 용기로 사용되고 있다. 귀중품이나 가보는 보따리에 싸지 않는다. 보따리에는 다른 장소에서 새 출발을 할 때 꼭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가재도구를 싼다.

  • 출발하는 것, 체류하는 것, 유목적으로 존재하는 것, 정주하는 것은 인간 삶의 주요한 범주이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운송 수단은 우리를 빠르게 다른 곳으로 이동하도록 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범주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관광객조차도 세계일주라는 극도의 사치를 누리는 동안, 사람들은 끝없이 느리고 고된 여정에 나서야 한다. 우리는 지금 여행의 본성에 관해 고찰하고 있지만, 사실 보따리를 둘러싼 연상의 유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그 주변 공간의 구성 요소, 특히 바닥이다. 일반적인 갤러리의 중립적인 바닥과는 다른 표면, 그러니까 독일 하노버 시 스프렝겔 미술관(Sprengel Museum) 무제움플라츠(Museumplatz)의 바닥처럼—자갈길을 연상시키는—거칠고 불편한 표면을 마주하면, 우리는 자신의 소유물을 전부 직접 들고 걸어가야 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 이어 우리는 정치적 또는 민족적 박해나 질병, 생태적 재난이나 경제적 몰락으로 인해 겨우 자신의 맨몸과 보따리 하나만을 간직한 채 이주를 강요당한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평범한 집기에서 예술 오브제로 승격되어 미술관에 놓인 김수자의 보따리는 불안 속에 저항하거나 불안을 안고 사는 사람, 국가가 없는 사람, 뿌리가 뽑힌 사람, 초대받지 않은 사람의 상징이며, 이방인 또는 외국인의 상징이다.

  • 작가의 보따리 안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이 입었던 옷가지가 담겨 있다. 그 옷은 한때 그것을 입고 있었던 사람의 대신하는 대상이 된다. 그들은 소설에 등장하는 용감한 영웅과는 거리가 멀다. 김수자는 그동안의 발언을 통해 보건대, 다른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깊게 공감하는 데에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었고, 특히 "우리 사회의 영웅주의, 위계질서, 궁핍, 경직된 사고, 차별, 무지, 거짓에 희생된 익명의 피해자들"에게 연민을 표현한 바 있다. [아티스트 북 『떠도는 도시들(Cities on the Move)』"을 준비하며 1998년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Hans-Ulrich Obrist)에게 보낸 이메일과 2001년 쿤스트할레 베른(Kunsthalle Bern) 전시 도록에서]. 이때 김수자는 의심의 여지 없이 자신의 조국인 한국의 지난 역사를 생각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운반 가능한 보따리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움직임과 의식, 지식, 시간과 공간 사이의 연결에 대해 성찰하도록 이끈다. 이렇게 피난과 이주라는 존재론적 주제와의 연결 속에서, 자유와 강제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 1997년, 가족의 끊임없는 이주 경험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김수자는 트럭 짐칸에 보따리를 산처럼 쌓고 줄로 단단히 고정한 채 조국을 횡단했다. 이 11일간의 여행-퍼포먼스 〈떠도는 도시들—2,727km 보따리 트럭 (Cities on the Move—2,727 Kilometers by Bottari-Truck)〉는 비디오 작품으로 남겨졌다다. 작품에서 김수자는 보따리 산에 올라 앉아 이동하는 방향을 응시하고, 우리에게는 오직 뒷모습만을 보여준다. 이동하는 트럭을 카메라가 항상 같은 거리에서 따라가는 동안,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여행자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자는 움직이지 않고 풍경이 움직이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소리가 추가된 버전에서 관객은 트럭이 지나가는 지역의 명칭을 거의 낭송하는 작가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여정의 시작과 끝, 목적지에 관한 질문은 우리가 영상을 보면 볼수록 점차 희미해진다. 여행은 '어떤 곳'와 '모든 곳'(Somewhere and Everywhere)을 통과하는 여정이 된다. 흘러가는 풍경에 대한 세밀했던 지각은 점차 필터가 끼워진 듯 몽롱한 지각으로 바뀌는데, 어쩌면 바로 이것이 여행의 중독적 잠재력을 이루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여행 특유의 이러한 몽롱함은 일반적으로 움직이지 않는 듯 보이는 어떤 것의 불안한 움직임에 대처하는 보호막일지 모른다. 이로써 여행자는 자기 자신의 내면, 그리고 이제는 자유로워진 사유의 흐름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 정확히 김수자는 고전적으로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재료인 천이나 옷을 사용함으로써 여성의 역할에 대해 질문을 제기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여성은 ‘이동’의 개념에 대립하는 사람, 즉 가정과 '돌봄'의 범주에 속하는 존재로 분류되어왔다. 작가가 활용한 이불보는 앞서 누군가가 사용한 것으로, 한국 여성들이 가족을 위해 직접 바느질한 것이다. 서구 문화에서 사회화된 관객은 이 이불보의 무늬와 색깔, 구도에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으리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이 이불보는 한 인간, 한 커플, 한 가족의 생애 주기에 동행하면서 사랑을 나누는 장소, 잠들고 꿈꾸는 장소, 목격의 장소이자 출산과 고통 그리고 죽음의 장소인 그들의 침상을 장식한다.

  • 결과적으로, 이 둥근 보따리는 한번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처음에는 강렬한 육체성이나 친밀성의 분위기를 풍기지는 않는다. 하지만 천과 같이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달라붙는 소재와의 접촉은 그 자체로 신체성과 연관이 있으며 천의 확장적 움직임과 연결된다. 아프리카 속담처럼 우리는 한 손으로는 보따리를 쌀 수 없다. 우리는 천을 펼쳤다 거두고, 털어서 걸고, 펴고, 개고, 덮고, 감고, 보따리로 싸고, 겹겹이 쌓는다. 이 모든 동작은 천을 다루는 오래된, 때로는 의례화된 방식이고 정확히 김수자는 이 동작을 자신의 예술 작업에 활용한다. 김수자가 보따리 천을 카페트처럼 바닥에 바로 깔든, 식탁보처럼 펼치든 그것은 초대의 제스처로 바뀐다. 설치미술 작품 <빨래터—바느질하며 걷기, 바라보며 바느질하기(A Laundry Field—Sewing into Walking, Looking Into Sewing)>(1997)에서 김수자가 천을 빨래줄에 널 때, 그는 전시에서 일상적 행위를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은 좀처럼 의식되지 않는 행위다. 사회적 인식과 차별에 대한 메타언어적 수준의 정보와 소통에 관해 알아가고자 한다면, 마당에서 매주 이루어지는 가정의 직물 전시만큼 적합한 것이 없다.

  • 김수자는 천과 바늘 그리고 실을 다루는 일을 평범한 방식으로 수행하면서도 그것을 개념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그리하여 한국의 미술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작가에게, 어머니와 함께 바느질을 한 일은 2차원적 캔버스를 넘어 오브제와 공간으로 나아가는 길을 그에게 제시한 최초의 경험으로만 그치지 않았다. 작가 자신과 그의 작품을 보는 관객 모두에게 깊고도 넓은 울림을 주는 하나의 관념은 작가 자신이 구상한 '바늘 여인'이라는 역할에서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낸다—그것은 공간 내 상호작용으로서의 바느질이라는 관념, 새롭고 다소 불안정한 삶-공간을 끊임없이 구축해나가는 사회적 행위로서의 바느질이라는 관념이다. 이 관념에는 어떤 현혹의 분위기, 심지어 함정이 도사린 듯한 분위기가 있다. 우리가 우정의 유대를 단단히 하거나 새로운 관계의 그물을 짤 때 그러한 분위기가 감돌듯이 말이다. 김수자의 강박적인 여행은 그러한 그물을 직조하는 행위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움직일 때에만 유대와 분리를 또렷하게 지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물질은 가까이 또는 멀리 있음을 느끼는 우리의 거리 감각에 영향을 준다. 김수자는 상하이, 도쿄, 뉴욕, 뉴델리 등 다양한 대도시에서 그를 지나쳐 흘러가는 행인을 마주하며 마치 시냇물의 바위처럼 거의 비현실적으로 경직된 자세로 가만히 서 있는 퍼포먼스를 반복했다. 작가의 등을 응시하며 김수자의 퍼포먼스가 담긴 비디오를 바라보는 관객은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반응하는 행인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순간 김수자는 저 비가시적인 공간들을 건드린다. 그것은 모든 개인이 자기 자신을 설정하는 공간이고, 스스로 잘 깨닫지 못하는 행동 방침에 따라 움직이는 공간이다.

  • 김수자에게 보따리는 "'자기만의 몸'이요, 하나의 자족적 세계다—하지만 그것은 물질적으로나 개념적으로 그릇처럼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는 우리가 보따리의 내용물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꽁꽁 묶을 수 있기 때문"이다[작가가 저자에게 보낸 2001년 이메일에서]. 미술관의 맥락에서, 일시적인 단위로 세심하게 만들어져 공간에 배치된 보따리는 관객으로 하여금 여행과 이주라는 구체적인 주제에 관해 숙고하게 한다. 수많은 보따리의 배치는 각 장소와 연관되어 있고, 따라서 그것은 매번 달라지는 가운데 여러 요소들이 통합된 전체적 구조를 창출한다. 그러나 각각의 개별 보따리 역시 수많은 부분으로 이루어진 통일체라 할 수 있다. 천 조각을 말고 펼치는 일상적 행위는 인간적 사유와 행동의 모든 영역, 그리고 우주와 자연의 모든 영역에 스미는 집중과 확산의 불가분한 상호작용을 상징하게 된다.

  • 다른 맥락에서 군집, 응축, 타협의 한 가지 예로 보일 수 있는 보따리는 우리의 지식을 증대시키는 생성적 질서의 원칙이다. 보따리는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반대 방향의 운동인 '확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고도로 압축되는 물질이나 에너지는 동시에 공간적 연장의 손실을 수반한다. 연장은 공간을 차지하지만, 그로 인해 힘과 장력을 잃는다. 이는 액체 속 성분의 농축에서도 뚜렷하게 보이듯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물리적 또는 화학적 현상이다. 만일 자연과학자가 사물과 현상을 하나로 묶고, 묶음의 개별 부분을 알지 못하고도 그에 대한 유효하고 유용한 법칙을 수립할 수 없다면, 오늘날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 행동의 전략으로서, 방향성이 있는 행동은 보따리에 비견될 만하다. 방향성이 있는 행동은 널리 흩어진 이니셔티브와 충돌한다. 우리는 광범위한 주의력과 더불어 어떤 정서적 상태, 즉 내적으로 집중하는 능력을 타고 났다. 사고 과정은 긴 브레인스토밍이나 극도로 예리한 가설로 응결될 수 있다. 꾸러미, 즉 보따리로 묶는 것은, 지각과 정보와 생각을 일시적으로 유용한 복합 단위로 한데 모았다 다시 사물의 흐름 속으로 되돌려 보내는 인간의 능력이다. 우리는 오직 이 방식을 통해 무한한 풍요로움 속에서 개별적 현상의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

  • 보따리는 어디에나 있다—몸과 마음, 자궁과 무덤, 지구와 우주, 우리의 정신과 지형을 접고 펼치는 보따리의 보따리의 보따리, 시간과 공간......[아티스트 북 『떠도는 도시들』을 준비하며 1998년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에게 보낸 이메일과 2001년 쿤스트할레 베른 전시 도록에서]. 따라서 김수자의 보따리 개념은 단순히 어디에나 존재하는 이동성의 현상 위에, 강렬하고 감각적으로 인지 가능한 신체의 비유를 겹쳐놓은 것에 그치지 않고, 아시아와 서양 문화, 일상과 예술, 과거와 현재가 얽혀 있는 순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정신적 여정 속에서 작가는 마침내 '보따리' 모티프와 '행성' 모티프의 상호 침투까지 생각해내기에 이르렀다. 작가에게 각각의 보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를테면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 등의 행성 같다— 다시 말해, 그것은 인간적 갈망의 다양한 성격을 시사하는, 우리의 운명을 알려주는 행운의 징표 같은 존재다" [작가가 저자에게 보낸 2001년 이메일에서].

— 하노버 시 스프렝겔 미술관에서 열린 개인전 《김수자, 보따리》 브로슈어에 실린 글을 독어에서 영어로 워렌 니에슬루호프스키(Warren Niesluchowski)가 번역.
영한 번역(한국문화예술위원회 후원): 홍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