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Needle Woman: Galaxy was a Memory, Earth is Souvenir, 2014, 46 x 4.5(diameter) feet, mixed media installation, photograph by Aaron Wax

세계 속에서 미술의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작가
김수자 Kimsooja

Young Hee Suh, 2015

누구든지 김수자 작가가 제작한 작품들을 신속히 훑어보기로 한다면, 필자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그의 작품들이 매체별로 정리된 웹 홈페이지 www.kimsooja.com로 일단 들어가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썩 잘 분류된 이 홈페이지는 작가의 글, 인터뷰, 작품에 대한 생생한 포트폴리오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필자도 여느 감상자들과 마찬가지이다. 김수자의 예외적인 전시들을 보기 위해 수시로 해외로 나갈 수는 없다. 그래서 빈번하게 이 사이트에 링크를 걸곤 한다. 그럼 그때마다 간화선(看話禪)의 화두 같은 작품들이 하나씩 하나씩 또렷이 드러나고, 이윽고는 일상에서 둔탁해진 의식의 벽이 얇은 필름처럼 예민해지는 묘한 기쁨을 느낀다.

김수자의 작품은 우리의 마른 감각에만 호소하지 않는다. 빠르고 격한 충격을 주거나 새뜻한 간질거림으로 자극하는 작품들과는 매우 다르다. 특이하게도 그의 작품들은 감상자의 몸과 의식을 동시에 사로잡고, 시각과 감성의 깊이(profondeur)를 파고든다. 그의 상상력과 정서도 그저 그렇고 그런 충동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 그의 미적 상상력은 출렁이지 않고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과 여유로운 호흡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도 너 나 없이 부지불식간에 방치해왔던 깊은 생각들 속으로 가라앉는다. '나'를 질문하게 하는 존재라는 것 혹은 세계 속 존재의 의미 내지 근원을 더듬어가는 사색의 느린 흐름을 타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감상자들의 이 같은 특별한 경험을 배려하기 위함인지, 작가는 자신의 작품 안에서 스스로 목소리를 내세우지 않는 편이다. 작품을 설치하고서는 에고의 흔적을 지운 채 조용히 물러난다. 예술가가 주관과 감정을 표면에 드러내지 않음이 감상자에겐 흔치 않은 당혹스런 일이 되겠으나, 하지만 그렇기에 스스로 의식의 체험을 할 수 있는 넉넉한 사유의 자리를 얻음에야 ... 그러니 우리가 그의 작품 속으로 풍덩 빠져 볼만 하지 않겠는가.

천들을 바늘과 실로 꿰매어 연결한 1980년대의 <ㄱ, ㄴ, ㄷ, ㄹ> 연작과 <天, 地> 연작에서부터 최근의 비디오 설치작품인 <地水火風> 연작까지, 작가의 작품 구성은 미니멀리즘을 연상시킬 만큼 늘 단순하고 구조적이다. 초기작에서 수직선과 수평선 혹은 사선으로 이어진 사각형 천들은 조각조각마다 염색된 오방색들을 그대로 드러낸 채, 협화음과 불협화음의 색조 구성을 보여준다. <지수화풍>에서도 세계를 구성하는 4 요소들인 흙, 물, 불, 바람의 자연 이미지들을 순열로 연결해 설치함으로서, 존재를 둘러싼 세계의 근원적 의미를 네 방향을 따라 구조적으로 사유하도록 한다. 작가가 스펙터클의 축으로 등장한 <바늘여인> 연작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등을 돌린 채 얼굴을 보이지 않는 침묵 상태로 그렇게 '수직'으로 멈추어 서있다. 그 대신 주변 도시와 다양한 면모의 사람들이 형형색색의 천 조각들처럼 '수평'으로 그를 감싸 흐르고 움직인다. 2010년을 전후해 등장한 일련의 비디오 작품들인 <뭄바이: 빨래터>과 <앨범: 허드슨 길드> 그리고 <실의 궤적> 연작들 역시도 유사하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보이지 않는 작가의 몸은 여전히 지구 곳곳을 수평으로 흐르는 갖가지의 존재의 삶들, 그 조각과 편린들을 끌어 모았다가 때가 되면 우리 눈앞에 보따리를 풀듯 펼쳐놓고 주목하도록 손짓한다.

그의 비디오 작품들은 그 전에 선행된 <보따리> 연작의 연장선 위에 있다. 초기에 천들을 아상블라주하듯 꿰맨 작품들은 평면작업이지만, 1991년 뉴욕 PS1 작업실에서 발견한 <보따리> 연작은 천들을 꿰매지 않고 천 조각 하나하나의 단위를 독립된 기표로 인식하면서 시작된다. 천 조각들은 색과 문양 그리고 크기에 상관없이 각각 하나의 기호가 되며, 전시장 바닥 혹은 테이블 위에 펼쳐놓는 산포의 기호로 유연하게 변화된다. 그러다가 작가가 어느 순간에 이 천 조각들을 끌어 모아 보따리로 싸면서, 평면 작업(수평 구조, 정지 상태)이 입체 작업(수직 구조, 이동 상태)으로 이행되고, 보따리는 신체와 함께 여행하는 오브제로 변환된다. 펼치고 싸는 다시 그 반대로도 전환되는 <보따리> 연작은 그 가변성과 이동성(유목성) 덕분에 시, 공간을 통한 작품 구조의 열림을 가져온 그야말로 현대미술의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이후 작가는 세계 곳곳마다 보따리들을 들고 다니며 전시장마다 상이한 퍼포먼스를 펼쳐 보였다. 그리고 우리는 보따리를 열 때마다 존재와 삶의 다양한 상들을 풀어내는 작가의 행위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미술의 정체성이란 경계를 허물며 다른 영역으로 나아갔다. 새로운 출발점은 <보따리>의 무한한 구조적 가변성에 있었다. 그로부터 작가는 천 조각들 대신 비디오 영상 단편을 매재로 삼고 그리고 보따리를 펼치고 싸는 일 대신 필름을 편집해내는 일로 이행하며, 전혀 또 다른 이미지들을 펼쳐냈다. 필자는 비디오와 필름 영상의 선택이 그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생각할 때마다, 감탄과 환호의 박수를 보내게 된다. 비단 작품 스케일과 구상에서 실현에 이르는 과정의 변화 뿐 아니라, 영상의 흐르는 시간성은 음양을 따라 오행하는 유동적 사태들 다시 말해 만물의 생성-변화-소멸의 변전을 근원적으로 설명해내는 최적의 방법적 조건을 마련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들숨과 날숨의 호흡이나 실을 잣고 씨실, 날실을 직조하는 일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이어지는 실의 궤적과 남미, 유럽의 바늘 여인들의 이중 구조 역시 그의 비디오 작품에서는 존재-삶의 구조적 양태에 대한 직관의 이미지들로 살아났다.

호흡(숨쉬기)은 우리 삶의 시작과 끝이다. 첫 호흡으로 태어나며, 마지막 호흡으로 생을 마감한다. 이 보이지 않는 들숨, 날숨의 끝없는 반복은 우주의 보이지 않는 무한 에너지(氣, 光)의 맥동 그 자체이다. 다양한 삶들을 이루는 바탕이자 가장 근본적이고 통일된 존재 상징으로서 이 호흡을 김수자는 2006년 마드리드의 '크리스탈 궁전' 내부에 가득 채웠다(<호흡: 거울여인>). 이어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도 <호흡하기: 보따리>란 설치작품을 통해, 전시장을 빛과 호흡으로 채웠다. 국내외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던진 두 설치작품들은 비시각적인 빛과 호흡을 특수 필름과 거울을 사용해 눈부시도록 찬란한 무지개빛과 확대된 호흡 소리로 즉 심장의 수축과 확장, 씨실과 날실의 직조처럼 손에 잡힐 듯 생생한 촉각적, 청각적 맥동으로 전환시켰다. 그리하여 작가나 감상자의 존재/부재를 부각시키는 한편 생명과 환경의 연계에 더 주목하도록 하는 관계적 상황을 연출해냈다.